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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문화 기행(139)<br> 정형에 얽매이지 않는 '허튼 가락' 산조산조(散調)란 무엇인가 가장 근접 기원설 중 하나 시나위 악기들이 각자 마음 내키는 대로 연주하는 듯하지만 절묘한 화성 바탕이나 기원은 무속음악 확실 김창조가 재구성 초기 형태 심방곡 산조 발생 시점으로 견해가 대표적 우리 음악을 크게 궁중음악과 민속음악으로 나눈다면, 민속음악은 다시 성악과 기악으로 나눌 수 있다. 성악(聲樂)은 사람의 음성으로 하는 음악을 말한다. 악곡의 종류에 따라서 판소리 등의 창가, 민요, 가요, 가곡, 기타 따위로 구분한다. 연주 형태에 따라서는 독창, 중창, 합창, 제창, 기타 등으로 나누고 기능에 따라서는, 일하면서 부르는 노래, 놀면서 부르는 노래, 종교적인 제의에서 사용하는 노래, 기타 등으로 구분한다. 이 땅에 존재하는 어떤 악기보다 사람의 목소리를 이용한 음악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것은 동서고금이 다르지 않다. 기악(器樂)은 악기를 사용하여 연주하는 형태를 말한다. 연주자의 수에 따라 독주, 중주, 합주 등으로 나누고 표현 형식에 따라 교향곡, 협주곡, 소나타, 실내악곡 등으로 나눈다. 우리 민요의 가창 방식 즉, 혼자 부르는 노래, 여럿이 부르는 노래, 돌려가며 부르는 노래, 주고받으며 부르는 노래 등에 대입해보면, 악기 연주 또한 유사한 형태로 구분할 수 있다. 표준국어대사전에 의하면 산조(散調)란 기악 독주곡을 말한다. 악기 하나를 가지고 연주하는 형태라는 뜻이다. 삼남지방(충청, 전라, 경상)에서 발달하였다 하고, 가야금, 거문고, 대금, 해금, 아쟁의 순서로 발생하였다 했다. 또 느린 장단에서 빠른 장단으로 배열된 3~6개 장단 구성의 악장으로 구분되며 반드시 장구 반주가 따른다고 했다. 하지만 다양한 산조의 기원설을 전제하거나, 판소리 소리북으로 장단을 맞추는 예들을 보면 '반드시'라는 수식으로 완성되는 장르나 개념은 아니다. 대개 그렇게 발생했고 그렇게 연주되니 그러한 것을 표본으로 삼는다고 말하는 편이 옳을 것이다. 산조(散調)의 우리말은 '허튼가락'이다. 산조의 기원을 시나위니 봉장취니 판소리의 선율을 악기로 표현한 것이느니 하는 얘기들이 여기서 나왔다. '허튼가락', 산조(散調)는 어디서 왔을까? '허튼가락'의 문자적 함의는 '정형적이지 않은', '흩어져 있는', '자유분방한', '율격에 얽매이지 않는' 등으로 풀이할 수 있다. 누군가가 이 장르에 산조라는 이름을 붙이기 전에 정형적이지 않고 흩어져 있는 어떤 음악의 형태가 있었다는 뜻이기도 하다. 그럼에도 산조라는 용어에 가장 근접한 기원설 중 하나가 시나위이다. 악기들이 어울려 서로 연주하는데, 각자 마음 내키는 대로 연주하는 듯하지만 절묘한 화성을 이룬다 해서 여러 기원설을 들어 설명하곤 한다. 그 바탕이나 기원이 무속음악인 점은 분명해 보인다. 표준국어대사전에서도 정악에 상대하는 향악(俗樂) 혹은 굿거리, 살풀이 따위의 무속음악이라고 풀이하기 때문이다. 경기도 남부, 충청도 서부, 전라도, 경상도 서남부 등지의 무가 반주 음악에서 나왔다는 설명이 붙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특히 시나위 자체가 육자배기 특징으로 된 산조의 기악곡을 말하기 때문에, 민요의 사례에 견주어 말한다면 육자배기토리로 권역화된 전라도지역의 무속음악, 다른 말로 하면 남도씻김굿 등이 기반이라고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산조라는 음악의 기원이 시나위로 대표되는 남도 무속음악에 있는 것인가? 그렇지 않다. 심방곡(心方曲) 혹은 신방곡(神房曲)기원설을 말하는 이유가 여기에 있다. 심방곡(신방곡)은 무속음악의 반주 음악과 다르다. 1610년 거문고 악보인 <양금신보>에 만대엽, 중대엽, 삭대엽 중의 중대엽에 속칭 '심방곡'이 나온다. 일반인들에게도 어느 정도 알려진 '오나리 오나리소서 뫼일에 오나리소서/ 졈그디도 새디도 마르시고....'라는 가사가 그것이다. 또 안민영의 '금옥총부'(1885)에 '창원 기녀에게 가야금 신방곡을 청해 들었다'는 기록과 '퉁소 신방곡'이 언급되고 있다. 무속음악과는 상당히 다른 음악으로부터 산조가 발생했다는 증언이다. 하지만 무엇보다 가장 유력하게 대두되었던 것이 판소리 기악화론이다. 판소리의 선율이나 장단을 모사하여 악기로 연주했다는 뜻이다. 판소리의 역사가 산조의 역사보다는 훨씬 오래되었으니 시대의 예술로 급성장했던 판소리를 모본 삼아 악기로 연주했다는 가설은 충분한 설득력이 있다. 봉장취 기원설도 있다. 봉장취는 유랑예인들이었던 풍각쟁이들이 봉황 혹은 기러기 등의 새 한 쌍을 주제로 하여 음악을 곁들여 연행하는 일종의 재담 연주 혹은 그로부터 파생된 새소리를 주제로 하는 기악곡을 말한다. 봉장취는 '봉장추', '봉작취', '봉황곡' 등으로 불렸다. 판소리 <변강쇠가>에 '봉장추'가 가장 먼저 등장한다. 중국 한나라 이후 전해진 음악이라는데, '봉이 새끼를 거느린다'는 뜻이라고 한다. 신재효의 <변강쇠가>에 따르면, 눈먼 '봉사'들이 구걸을 위해 연주하던 곡이었고 이것이 풍각쟁이들의 음악으로 정착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어느 것 하나 '오로지' 혹은 '반드시'라는 수식을 충족하지는 못한다. 연구자들에 따라서는 봉장취나 산조가 제각기 다른 역할을 하면서 병행 발전해왔다고 주장한다. 또한 계보론이나 지역론 특정 계파론 만으로는 산조의 기원이나 발생설을 충분하게 설명할 수 없다는 반론도 있다. 그럼에도 영암사람 김창조가 재구성한 초기 형태의 심방곡을 산조의 발생 시점으로 보는 견해는 아래 팁에 소개하는 것처럼 그 시대의 대표격이라는 점에서 그렇다. 마치 판소리의 기원설을 여러 가지로 말하지만 일정한 텍스트나 인물을 거론하고 예컨대 영산강의 시원을 말하는데 황룡강, 극락강, 지석강의 여러 물줄기 중 담양 용소로 말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가야금산조 발생과 영암사람 악성(樂聖) 김창조 함화진(咸和鎭, 1884~1948, 일제강점기 아악사)의 <조선음악통론>(1948)에 보면, "신방초는 화초사거리를 창작하고 김창조는 심방곡을 변작(變作)하여 산조를 창작할새, 우조와 계면조로 분류하여 각종 악기에 탄주하기 시작했다"고 설명한다. 김창조가 가야금으로 현재의 산조라는 음악을 재구성했음을 확인해주는 대목이다. 하지만 이 시기까지의 형태는 지금의 산조형식을 갖추었다기보다는 자유분방한 초기 형태의 음악이라고 할 수 있다. 가야금산조가 19세기 중반 무렵에 심방곡으로 시작되었음을 확인해주는 자료는 안민영의 <금옥총부>(1885)가 대표적이다. 권도희의 연구에 의하면, 당시 심방곡의 명인이 경상도 마산포에 살던 최치학이었다. 첫 세대라고 할 수 있는 이들로 전남의 김창조, 한숙구, 유성천, 전북의 박한용, 이영채, 박한순, 충청의 박팔괘와 심정순 등을 거론한다. 이들이 동시대의 음악 형식을 정형화하는데 충분히 기여했다는 점이 여러 연구에서 확인되고 있다. 이후 김창조의 제자 한성기, 안기옥, 정남희, 강태홍, 최옥삼 등과 한숙구의 제자 한수동, 정남옥 등, 유성천의 제가 유대봉 등, 박한용의 제자 김삼태, 이영채의 제자 신관용, 박학순의 제자 신쾌동, 심정순의 제자 심상건 등과 더불어 김해선, 김운선, 함동정월 등 여성 산조 연주자들이 등장한다. 산조의 발생과 정형화에는 이같은 맥락들이 있기 때문에 '오로지' 김창조만이 산조를 재구성했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그럼에도 김창조를 내세우는 것은 문헌들이 전하는 바를 전거하는 것이요, 시대적 수요에 부응했던 초기 기여자들의 대표격으로 거론하는 것이라는 점 부기해둔다. 김창조(1856~1919)의 출생설이 두 가지다. 1865년과 1856년설인데 여러 가지 맥락상 후자가 사실에 더 근접하다. 세습율객집안 출신으로 영암읍 회문리에서 출생했다. 1915년 경에 광주로 이주하여 활동하였고 1916년부터 전주로 옮겨 군산, 나주, 정읍, 대구 등지에서 활동한다. 64세 되던 1919년 인후염에 걸려 제대로 치료받지 못하고 광주 북문안 어느 집에서 쓸쓸하게 생을 마감한다. ※ 외부인사 원고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일치하지 않을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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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통 탄탄한 국악관현악: ‘작곡가 이강덕[국악신문 정수현 전문기자] =국립국악원 창작악단은 지난 7~8일 기획공연 ‘작곡가 시리즈 Ⅲ’을 선보였다. 작곡가 시리즈는 창작국악의 토대가 된 작곡가를 선정해 의미를 되새기는 무대로, 이번 공연은 창작국악 1세대, 작곡가 이강덕의 작품만으로 꾸며졌다. 이강덕은 이왕직아악부원양성소를 졸업하고 이왕직아악부 아악수를 거쳐 국립국악원 국악사로 재직했다. 연주자이자 작곡가, 지휘자로 활동한 그는 1962년 관현악 '새하늘'로 국립국악원 신국악 작곡 공모에 당선, 작곡가로 등단한 후 관현악, 협주곡, 중주곡 등 80여 편의 다양한 작품들을 남겼다. 이번 공연에서는 지금도 가장 널리 연주되고 있는 대표 관현악곡과 협주곡이 총 5곡 연주되었다. 7일에는 가야금 서은영 국립국악원 창작악단 수석, 피리 진윤경 한국예술종합학교 교수, 해금 이동훈 전북대 교수가, 8일에는 초연 당시 협연자들이었던 가야금 이재숙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피리 이종대 부산대 명예교수, 해금에 홍옥미 지영희류 해금산조 보존회장이 무대에 올랐다. 공연 둘째 날이었던 8일, 국립국악원 예악당에는 많은 관객들이 자리했다. 무대를 열어낸 첫 곡 ‘송춘곡’은 ‘봄을 칭송한다’는 제목처럼 봄날에 펼쳐지는 아름다운 전원 풍경을 낭만적이고 서정적인 감각으로 그려냈다. 경쾌한 선율은 중간중간 반음계를 내어 특수한 느낌을 내기도 했는데, 마이너하지만 심각하지 않은 단순하고 깔끔한 진행이 돋보였다. 이 곡은 또한 짧은 구로 이루어진 단일 주제를 가지고 곡의 시작부터 끝까지 다양하게 변형 및 발전시켰다. 장단과 리듬에 변화를 주며 흥겨운 느낌을 내다보니 지루할 틈 없었고, 국악기가 낼 수 있는 가장 편안한 음계와 선법을 활용한 진행은 한국적이고 다채로운 느낌을 주었다. 음악적인 구조 또한 탄탄했다. 관현악기들의 주고받는 부분이나, 서로 비워주고 채워주는 구간이 확실하여 관현악의 특징을 잘 살려냈다. 어느 악기 하나 소외되지 않도록 균형 있게 비중을 둔 깔끔한 곡이었다. 본격적으로 협주곡이 시작되었다. 처음 독주자로 나선 해금 연주자 홍옥미 명인이 연주한 ‘해금협주곡 4번’에는 경기지방 무속 가락을 근간으로 만든 지영희류 해금산조의 특징이 담겨있었다. 관현악은, 진양부터 자진모리장단까지 산조 장단의 흐름에 따라 해금의 특수한 표현에 맞추어 풍성함을 만들어 내거나 해금을 받쳐주는 분위기를 조성하는 데 힘썼다. 홍옥미 명인의 해금 연주는 화려하거나 멋 내는 느낌보다는 소박하면서도 힘이 있고 깔끔한 성음이 돋보였다. 군더더기 없는 농현과 선율, 과하지 않은 표현과 흥청대는 장단이 조화롭게 어우러졌다. 특히 그가 연주하는 평우조(화평하고 평온한 조)는 발랄하면서도 우직했고, 마지막 푸는가락에 이르러 연주된 꺾거나 떨어내는 표현은 민속악적 색채가 짙게 묻어나며 명인의 오랜 공력이 돋보였다. 세 번째로 ‘메나리조 주제에 의한 피리 협주곡’이 연주되었다. 경기시나위 보존회장을 지니고 있는 명인 이종대의 피리 연주로 진행된 이 곡은 신명 나는 굿거리장단으로 시작했다. 우리나라의 아름다운 금수강산이 떠오르는 민속적이고 밝은 선율이 돋보였으며, 시원하게 뻗어내며 연주하는 피리 선율이 매력적이었다. 이 곡은 강원도 메나리조를 바탕으로 만들어진 곡으로 토속적인 민요적 요소가 강했고, 빠른 패시지로 진행되는 순차 진행이 많았다. 이강덕 명인은 간드러지고 여유 있는 호흡으로 물 흐르듯 연주하였고, 구성진 피리 농음과 흘러내려 떨어내는 메나리조의 선율적 특징을 잘 살려내어 연주해 냈다. 더불어 관현악 또한 안정적이고 깔끔한 연주로 탄탄한 완성도를 자랑했다. 이강덕이 작곡한 협주곡 가운데 가장 많은 것이 바로 가야금을 위한 협주곡이다. 이날 연주된 ‘가야금 협주곡 1번’은 가야금을 위한 협주곡으로는 제일 처음에 작곡된 곡이다. 또 독주 악기 혼자 기량을 발휘하는 카덴자(Cadenza)가 이 곡에서 처음으로 창작국악에 사용되었다. 둘째 날 무대에서는 이재숙 서울대학교 명예교수가 가야금 협연자로 함께했다. 이재숙 명인은 깊은 울림이 가득한 연주로 심금을 울렸고, 여유롭고 힘 있는 연주로 관객들의 귀를 사로잡았다. 굿거리로 시작하여 4/4박자, 중모리, 굿거리, 카덴차, 동살풀이로 계속해서 바뀌는 장단 속에서, 가야금의 다양한 표현이나 변화구를 감상할 수 있었다. 장단에 맞추어 연주하는 가야금 연주와 더불어 장구의 장단이 계속 반주로 함께 했는데, 황병기 가야금 연주곡이 연상되기도 하며 연주에 온전히 집중할 수 있게 해 주었다. 이재숙 명인의 가야금은 ‘외유내강(外柔內剛)’이었다. 겉으로는 소박하고 여유로운 듯 보이나, 그 안은 매우 깊고 단단했다. 무대는 ‘염불 주제에 의한 환상곡’으로 마무리되었다. 작곡가 이강덕이 돌아가신 아버지를 그리며, 고인이 극락세계에서 편안하게 지내기를 바라는 뜻으로 창작한 작품이다. 모든 악기가 함께 짧은 주제 선율을 강하게 연주하며 곡이 시작되었다. 이 곡은 전체적으로 밝고 화려하며, 경쾌함이 주를 이루었는데, 그 안에 악기들이 번갈아 가며 질러내는 부분이 많이 등장했다. 이는 마치 돌아가신 아버지를 그리워하는 아들의 마음이 반영된 듯 느껴졌다. 곡이 진행되는 가운데 중간중간 들리는 징 소리와 방울, 목탁 소리, 그리고 민속악적 색채가 짙은 장단과 선율은 ‘나무아미타불(南無阿彌陁佛)’의 가사를 노래하는 육자염불이 연상되었다. 뒷부분에 이르러서는 느린 무장단 안에 피리와 대금이 서로 번갈아 가며 독주 선율을 연주하였는데, 메나리조를 중심으로 연주된 선율에는 슬픔과 한이 가득 서려 있었다. 아버지의 극락왕생을 간절히 기리는 작곡가의 마음이 묻어났으며, 깔끔하고 균형 있는 장단과 선율 진행은 자유롭고 탄탄했다. 이강덕은 음악과 전통에 관한 이해도가 높은 작곡가였다. 그의 음악은 기승전결이 뚜렷했고, 완성도가 굉장히 높았다. 어느 하나의 악기에 치우치지 않고, 각 악기의 음색과 음높이를 잘 활용하여 풍성하고 탄탄한 음악적 구조를 만들어 냈다. 또 장단과 조, 악기의 특징을 잘 활용했으며, 단순한 선율적 리프(일정한 코드 진행을 반복하는 반복구)를 사용, 발전시켜 주제 테마로 만들어냈다. 그 테마를 반복하여서 들려줌으로써 관객들은 음악을 더욱 친숙하게 받아들일 수 있었다. 특히 이번 공연을 통해 전통 악기가 지닌 본연의 소리와 조화를 느껴볼 수 있었다. 요즈음 새로 작곡되는 관현악은 서양 음악에서 온 코드 진행이나 화성법이 다양하게 활용된다. 하지만 이강덕의 음악은 화려하거나 서정적이기보다는, 악기가 고유하게 지니고 있는 음색, ‘조’와 ‘장단’을 집중적으로 활용한 단순하고 깔끔한 진행을 선보였다. 창작국악 1세대 작곡가의 음악을 통해, ‘기본’과 ‘전통 본연의 소리’에 집중하며 국악 관현악이 앞으로 나아갈 방향에 대해 다시금 깊이 생각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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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년 前 국악의 아름다움, 음반 전시,100년 전 옛 음반에 수록된 판소리 등 국악을 직접 들을 수 있는 전시가 마련된다. 국립국악원과 국립아시아문화전당은 3월 5일부터 4월 7일까지 광주 동구 국립아시아문화전당 문화창조원 복합전시5관에서 '최고의 소리반: 신춘에는 엇든 노래 유행할가' 전시를 개최한다고 29일 밝혔다. 광주광역시 동구 국립아시아문화전당 문화창조원 복합전시 5관에서 ‘최고의 소리반-신춘에는 엇든 노래 유행할가’ 전시를 연다. 이번 전시는 국립국악원이 수집한 유성기 음반 100여 점과 가사지, 사진, 신문기사 등 관련 자료들을 만날 기회다. 국립국악원은 현전하는 가장 오래된 궁중음악 음반인 ‘조선아악’과 ‘아악정수’를 복각해 이번 전시회 때 선보인다. 또 이화중선, 임방울, 김소희 등 당대 명창의 소리를 보다 생생하게 들어볼 수 있도록 복각한 디지털 음원 150여 점을 공개한다. 이번 전시는 유성기 음반과 관련 자료를 감상할 수 있는 전시실과 관객이 복각된 음원과 엘피를 체험할 수 있는 감상실로 나눈다. 전시 1부 ‘최초의 소리기록’에서는 유성기와 음반의 역사를 소개한다. 2부 ‘최고의 가치’에서는 조선 궁중음악인 ‘조선아악’이 기록된 유성기 음반과 관련 자료를 공개한다. 3부 ‘최고의 인기’에서는 1920~30년대 인기를 끌었던 ‘춘향전’을 다룬다. 당시 유명 음반회사에서 발매한 음반과 시기별 변천 과정을 소개한다. 4부 ‘최고의 스타 명창’에서는 송만갑, 이동백, 이화중선, 임방울, 박록주 등 당대 명창들의 사진과 관련 기록을 만날 수 있다. 5부 ‘국창 임방울의 음반’에서는 호남권 대표 국창 임방울의 탄생 120주년을 기념하는 공간이다. 전시 기간 매주 수요일 저녁 7시에는 명창 주소연, 김명남, 하선영, 허애선의 ‘심청가’, ‘흥보가’, ‘춘향가’를 감상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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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악의 날은 1월 21일(양력), "아악이 처음 연재된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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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무형유산 종묘제례악·처용무 보유자 故 김천흥 자료집 발간국가무형유산 종묘제례악과 처용무 보유자인 고(故) 김천흥(1909~2007)의 무보, 공연사진 등 자료 1186건이 실린 자료집이 그가 세상을 떠난 지 16년 만에 나왔다.우리나라 무형유산 발굴과 전승에 지대한 공헌을 한 김천흥의 무악(舞樂) 인생은 1922년 이왕직아악부 아악부원양성소에 입소하면서부터 시작됐다. 이왕직아악부는 일제강점기 왕립음악기관으로 국립국악원의 전신이다. 김천흥은 이곳에서 해금과 양금을 전공과 부전공으로 수련했다. 궁중정재를 전수받아 조선 마지막 임금인 순종의 50세 탄신 경축 연회에 무동(舞童)으로 참여했다.김천흥은 어린 시절 전수받은 궁중정재 외에도 문헌으로만 전해지던 궁중정재를 복원·재현하여 명맥이 이어질 수 있도록 했다. 아악부원양성소 퇴소 뒤에는 승무, 살풀이춤 등 민속무용을 섭렵하고, 전국 각 지역 탈춤을 발굴해 연구·조사했다. 전통을 기반으로 한 작품도 여럿 창작해 우리 전통무용과 국악을 보존했다. 전통을 기반으로 한 작품 창작에도 관심이 많아 창작무용극도 여러 편 무대에 올렸다. 해방 뒤에는 왕실 잔치에서 공연되는 연주곡·노래·춤으로 이루어진 궁중정재를 복원·재현해 명맥이 이어지게 했고, 각 지역 탈춤을 발굴조사해 공연장에 올렸으며, 창작무용극도 여러 편 짓는 등 조선시대 무악유산 전승과 대중화에 이바지했다. 이번 기증자료집에는 1920~30년대 이왕직아악부 시절 사진, 해금과 양금 등 김천흥이 직접 사용했던 악기, 춤 동작을 그림으로 작성한 친필 무보(舞譜), 공연 때 입었던 복식 등 유족이 기증한 자료 1186건이 실렸다.특히 해금은 아악부원양성소 시절부터 전공으로 삼아 종묘제례악에서 해금 보유자로 활동했던 김천흥의 음악 인생을 보여주는 악기다.김천흥이 직접 대본을 쓰고 안무를 구성해 1959년 초연한 '처용랑' 대본과 홍보물, 공연사진은 전통음악과 춤을 바탕으로 기존과 다른 무용극을 새롭게 보여주고자 했던 김천흥의 시도를 보여주는 자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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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무들의 예술혼을 만나다"국립국악원(원장 김영운)은 오는 9월 12일(화)부터 21일(목)까지 총 6회에 걸쳐 국립국악원 풍류사랑방에서 ‘일이관지 – 무용(명무)’ 공연을 개최한다. 이번 무대에는 국립국악원 무용단, 무형문화재 보유자, 원로 및 중견 및 신예 무용가들이 한국 전통 춤의 정수를 전한다. 우리 춤의 맥을 잇는 국립국악원 무용단이 맞이하는 9월 일이관지의 첫 무대(9.12.) 일이관지(一以貫之) 무용 편의 첫 무대는 국립국악원 무용단 중견단원들의 춤판으로 막을 연다. 국립국악원 무용단은 조선조의 장악원, 대한제국 시기 교방사, 이왕직 아악부의 정재(呈才)의 맥을 잇고 있다. 이번 무대에서는 국립국악원 무용단의 독보적인 궁중정재 ‘춘앵전’을 선보이며, 민속춤의 핵심 레퍼토리인 ‘승무’, ‘태평무’, ‘살풀이춤’, ‘산조춤’을 감상할 수 있다. 한평생을 춤에 바친 무형문화재 보유자와 원로 명무들의 춤 인생(9.13., 9.14.) 13일에는 무형문화재 춤 종목 예능보유자 반열에 오른 명무들의 무대가 펼쳐진다. 부산시 무형문화재 동래한량춤 보유자 김진홍의 ‘동래한량춤’을 시작으로 국가무형문화재 태평무 보유자 양성옥의 ‘살풀이춤’, 국가무형문화재 도살풀이춤 보유자 양길순의 ‘도살풀이춤’, 서울시 무형문화재 한량무 보유자 조흥동의 ‘한량무’, 국가무형문화재 승무 보유자 채상묵의 ‘승무’, 국가무형문화재 살풀이춤 보유자 정명숙의 ‘살풀이춤’을 선보인다. 춤이 형성되고 전승된 내력과 춤에 녹아있는 인생을 엿볼 수 있는 무대가 될 것으로 기대된다. 14일 무대에는 예술적 경지에 이른 6인의 명무들이 차례로 무대에 오른다. 왕비의 춤추는 자태 속에서 태평을 그려내는 유정숙의 ‘태평무’를 시작으로 노인을 그려내지만 마음은 늙지 않았다는 노인의 심경을 표현한 김정학의 ‘신노심불로’, 한 여인의 모습에서 슬픔과 기쁨을 볼 수 있는 진유림의 ‘살풀이춤’이 이어진다. 정인삼의 ‘고깔소고춤’, 경임순의 ‘교방장고춤’, 박은하의 ‘쇠춤’에서는 축제의 현장에서 진실하게 악기를 치며 관객을 기운 충만하게 만들고, 동시에 스스로 해원을 이루는 춤을 선보일 예정이다. 한껏 물오른 남무와 여무의 춤판(9.19., 9.20.) 19일 공연에는 남성 명무들의 몸짓이 관객의 마음을 사로잡는다. 한량이라는 인물을 모티프로 하여 1980년을 전후하여 작품화하기 시작한 남성 홀춤의 대표 종목인 ‘한량무’를 윤성철이 선보이며, 남기성은 영남지방 탈춤과 허튼춤에서 추던 덧배기춤들을 재구성한 춤인 ‘허튼덧배기춤’을, 김장우는 춤꾼과 관객이 입타령을 하면서 추는 ‘입춤’으로 무대를 꾸민다. 강성민은 ‘이매방류 승무’로 짧고 지난한 삶의 희비를 그려내며, 박명현은 진도의 농악춤 북놀이를 전문 예인 고 박병천이 작품화한 ‘진도북춤’을 선보이며 막을 내릴 예정이다. 20일 무대는 중견 여성춤꾼들이 전통춤을 새롭게 해석하거나 재구성한 작품들을 선보인다. 노해진의 ‘아가(雅歌)’는 인간의 헤어짐과 그리움을 그려내며, 최주연은 ‘교방굿거리춤’을 통해 여흥의 자리에서 서서히 흥을 돋울 예정이다. 이어서 봄날 만개한 벚꽃을 바라보며 그 감성을 춤으로 표현한 김혜윤의 ‘황무봉류 산조’와 매서운 추위를 견디고 돋아난 매화를 떠올리며 그 향기를 그린 최정윤의 ‘매향무 부채입춤’, 인당수에 빠진 심청의 효심을 생각하며 노래한 장현수의 ‘효심무 맨손살풀이’를 만나볼 수 있다. 한국춤의 정통성을 전승할 차세대 일이관지 주자들의 특별한 무대(9.21.) 9월 공연의 마지막 무대에는 국내 유수의 전통춤 대회에서 입상한 신진 무용수들이 관객을 맞이한다. 이민지와 김시백은 ‘한영숙류 태평무’와 ‘강선영류 태평류’를 선보이며 한영숙과 강선영의 각각 서로 다른 미적 취향을 보여줄 예정이다. 황지목은 ‘이매방류 승무’를 통해 호남지방 스타일로 추는 승(僧)의 춤을 그려낼 예정이다. 정지수는 궁중정재의 지평을 넓힌 독무로 추는 궁중무 ‘춘앵전’을 선보이며 이승찬은 남성 홀춤의 독자화를 이룬 ‘한량무’을 올린다. 마지막으로 최우민은 전남 해안의 북놀음의 특징을 모아 구성된 ‘버꾸춤’으로 마지막 무대를 장식한다. 예매는 국립국악원 누리집(gugak.go.kr)과 전화(02-580-3300)로 가능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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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상진의 한류 이야기 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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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한국의 지역춤, 부산·경남지역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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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무성 화백의 춤새 (53)<br> 김천흥 명인의 '춘앵무' 춤사위춘앵무 19세기 초 조선 순조(純祖) 창작된 궁중정재의 하나로 순조의 아들 효명세자가 순원왕후의 탄신 40주년을 기념해 지은 춤이다. 버드나무 가지에서 맑게 지저귀는 꾀꼬리의 모습을 보고 만들었다고 전해진다. 궁중 대잔치 때 화문석 하나만 깔고 한 사람의 무기(舞妓)가 그 위에서 주악에 맞춰 추는 춤으로 무산향과 더불어 궁중무용의 유일한 독무다. 춘앵무는 지극히 절제된 춤을 추기 때문에 그 움직임이 거의 느껴지지 않는 것이 특징이다. 심소 김천흥은 1909년 한성부에서 목수의 아들로 태어났고, 정동보통학교를 졸업 후 1922년에 이왕직 아악부 아악사양성소 2기생으로 입소했다. 1923년 순종황제 오순탄신연에 무동으로 참가하여 '조선의 마지막 무동'으로 불렸다. 해금을 전공, 양금을 부전공으로 하여 1926년에 졸업하였다. 그는 1940년까지 이왕직 아악부에 근무하며 아악수, 아악수장을 역임했다. 궁중정재의 대가로 통했으며, 국립국악원 무용단에서 평생 후학을 양성했다. 민속무용에도 일가를 이루어 살풀이춤, 승무로 무대에 서기도 했으며, 2007년 99세로 타계하기까지 국악계의 대원로로 활동했다. 만년까지 국립국악원 무용단에서 이애주, 인남순 등 제자들을 지도했고, 중요한 사승 인맥 중 한 사람이 한성준이다. 궁중무용은 정악 거문고의 대가였던 이수경에게서 배웠으며, 권번 재직시절에는 탈춤과 같은 민속무용을 배우는데에도 주력하여 궁중무용과 민속무용을 겸전했던 몇 안되는 인물 중 하나가 되었다. 그 때문에 살풀이춤이나 승무로도 제법 많이 무대에 섰다.장기는 '처용무'와 궁중 정재 가운데 독무인 '춘앵전'이다. 춤에만 능했을 뿐 아니라 정재 전반의 구성에도 탁월한 면모를 보였는데, 특히 창사(唱詞)도 잘했다. 담백한 창법으로 부르는 그의 창사는 일품으로 꼽힌다. 김천흥(1909~2007) 2006.03~2007.08 국가무형문화재 제1호 '종묘제례악' 명예보유자 2006.03~2007.08 국가무형문화재 제39호 '처용무' 명예보유자 이왕직아악부원양성소이왕직 아악부 아악수장(1922년~1940년)대한국악원 이사(1945년~1950년)국립국악원 원로사범(1951년~2007년)대악회 이사장(1973년~1993년)대한민국 예술원 회원(1978년~2007년)무형문화재예술단 단장(1983년~1993년)심재 정악단 창단 고문(2004년)문교부 문화보존위원회 위원국립국악원 예술사국립국악원 국악사서울특별시 문화위원서울대학교 음악대학 강사경희대학교 강사이화여자대학교 강사 수상2001년 금관문화훈장 1997년 방일영 국악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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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왕실의 마지막 무동(舞童)' 김천흥 명인심소 김천흥(1909~2007)은 평생을 전통예술의 전승과 복원이라는 일념으로 살았던 예술인이었다. 심소 김천흥 선생은 14세가 되던 1922년, 이왕직아악부 양성소 2기생으로 입소했다. 이후 1923년 순종황제의 오순(五旬) 기념 진연에 참가해 12개 종목의 궁중무용을 전수 받아 '조선의 마지막 무동'으로 불렸다. 2007년 99세로 영면하기 직전까지 국립국악원 원로사범, 중요무형문화재 종묘제례악과 처용무의 예능보유자로 활동했다.또한 심소 선생은 1970년대 말부터 궁중무용 재현의 사명감과 애정을 가지고 연구, 33종의 궁중무용을 재현했다. 현재까지 문헌에 의해 전해지는 궁중무용은 총 57종으로 이중 45종의 궁중무용이 심소 선생에 의해 재현, 전승됐다. 악가무(樂歌舞)에 능했던 김천흥 보유자는 1950년대후반에 전국 각지를 돌며 전통춤과 연희를 발굴하였고, 무형문화재 지정을 위해 여러 편의 조사보고서를 남겼다. 또한 이왕직 아악부의 후신으로 국립국악원이 개원하자 궁중무용의 맥락을 잇기 위해 이왕직 아악부원 양성소시절에 익힌 춤과 옛문헌에 의거한 ‘봉래의‘. ‘보상무’, ‘박접무‘, ‘무신향’ 등 40여종의 궁중무용을 복원하였다. 이 자료들은 예술사적 성과를 넘어 한국 근현대예술사의 발전과정을 총체적으로 조망할 수 있는 소중한 보고라는 가치를 인정받아 국가기록원으로부터 국가지정기록물로도 인정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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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전통춤 명인 학산(鶴山) 김덕명 생애와 춤세계 1양산학춤은 2014년과 2016년, 2017년 등 지금까지 네 차례 무형문화재 지정 시도가 있었지만 심사 단계에서 신청자에 대한 관련 단체 전체의 동의를 받지 못해 제대로 심사도 받지 못하고 지정이 무산된 것이다. 양산문화원은 양산학춤 전수회관 건립도 추진하는 등 양산학춤을 지역을 대표하는 전통 문화자산으로 적극적으로 육성할 계획이라고 밝혔다. 양산학춤은 통도사에서 전래해 지역에서 동면 출신의 학산 김덕명 옹이 전수해 민간 계보로 전승된 지역 고유 춤으로써 선비 사상을 강조한다. 이병옥 교수가 김덕명의 중후반의 행적을 살피고 예술성과 학술적 가치를 고찰하기로 한다.(편집자 주) 중반의 시련을 딛고 일어선 영남 명무 1975년 11월 5일 제6회 김덕명 전통고전(춤)전수자 발표공연을 부산대학교 대극장에서 마치고 한량무 강습을 할 때 진주팔검무회가 찾아와 진주시립국악원 및 진주 팔검무회의 상임사범을 부탁하여 승낙하게 되었다. 이듬해 1976년부터 1981까지 5년간 진주에서 전통춤을 가르치게 되었다. 1975년 제6회 발표회를 마친 후 그는 모처럼 동래야류 공연이 있어 전수관을 찾아갔다. 그동안 그들과 친분이 있어 공연 후 뒤풀이로 학춤을 선보였던 것인데 때마침 동래야류 공연을 참관하려 방문한 문화재 전문위원 서국영(徐國英)은 그의 학춤을 보고 탄복했다. 그는 즉시 문화재 전문위원으로 함께 활동하는 김천흥(金千興, 1909~2007, 처용무 보유자)에게 발굴할 가치기 있는 학춤을 찾았다고 부산에 올 것을 알리자 소식을 듣고 증인확보를 위해 수제자 이흥구(李興九, 1940~ , 학연화대무 보유자)와 함께 부산에 왔다. 그리하여 1975년 김덕명은 김천흥 일행과 부산 동래별장에서 춤판을 벌였다. 3일 동안 이어진 그의 춤은 독특한 멋이 담긴 춤사위로 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고 절로 흥이 났다. 김천흥도 흥이나 직접 궁중정재 춘앵무와 학춤을 추었으며, 이흥구는 김덕명의 남성적이며 호방한 학춤에 반하여 기록수첩을 잃어버릴 정도였다고 한다. 당시 부산·경남지방에서 전승되는 학춤에는 양산지역 학춤과 이미 1972년 9월 19일 부산시 무형문화재 3호로 지정된 동래학춤 등 두 종류가 있었다. 서국영, 김천흥 조사자들의 공동작업(1975.7.25.~8.25까지 조사활동)으로 이듬해인 1976년 12월 7일 『(양산)사찰학춤』(중요무형문화재 보고 제122호, 1976년5월 보고서 제출)의 무보를 수록한 조사보고서를 문화재 관리국(현 문화재청)에 제출하였다. 여기서 양산사찰학춤의 유래(寺刹鶴춤의 由來)에 대해 수록내용 자료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사찰학춤에 관한 문헌은 찾아볼 길이 없고 다만 조사할 수 있는 무수(舞手)들을 알아내어 그 계보를 찾아볼 수 있을 뿐이다. 양산 통도사는 신라 선덕여왕 15년(646년, 자장율사(慈藏律師))에 창건된 이래 그 어느 때부터 인지는 모르나 대재(大齋)행사 때나 종무(宗務)총회 시에 의례(儀禮)행사로서 승무와 학춤을 대대로 계승해 왔다는 말을 명무승려인 신경수(辛景壽, 1893~1965)로부터 들었다고 하는 보광(寶光)중학교 교장 및 통도사 주지를 역임한 김말복(金末福)의 증언을 얻은 것이다. 그에 의하면 이조말엽 청종 시대까지의 무수(舞手)승려는 미상(未詳)이나 고종시대인 1980년부터는 이월호(李月浩, 당시 어산종장(魚山宗長)), 1980년대부터는 김설암(金雪岩), 그리고 1920년 이후에는 전술한 신경수와 양대응(梁大應, 1897~1972)등으로 승무와 학춤이 계승되어 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통도사에서는 특히 사찰학춤이 있다는 것을 입증한 김말복은 신경수, 양대응의 학춤을 직접 목격하였다고 하며, 신경수는 사하(寺下) 부락인 신평리(新坪里)에 나와서 남소석(南小錫, 1904~1960)의 꽹과리 장단에 맞추어 학춤을 추었다는 사실까지 밝혀주고 있다. 그러나 전술한 바대로 신경수의 사찰학춤이 사하부락에 흘러나오기 이전에 이미 양산군(梁山郡) 동면(東面) 내송리(內訟里)에 학춤이 계승되어 왔는바 향토무용에 관심이 있었던 안화주(安化周, 당시 83세)의 증언에 의하면 동(同) 내송리 거주 김두식(金斗熄, 1843~1930)은 당시 곡수(穀收)운반 관계로 약 40세에 통도사 출입을 한 분으로서 향토무에 자질이 있어 사찰에서 학춤을 즐겨 전수받아 추었으며, 이 춤을 다시 동(同) 부락거주 황종렬(黃鐘烈, 1897~1957)에게 전수했고, 이어 김덕명(52세, 김두식씨의 손자)에게 전해진 것으로 밝혀졌다. 앞에서 언급한 신경수의 사찰학춤의 춤사위를 기억할 수 있다고 하는 김말복은 현재 예능보유자인 김덕명의 학춤사위를 보고 통도사의 사찰학춤사위와 흡사하다고 인정하므로 김덕명의 학춤은 분명히 통도사 사찰학춤의 계열임을 결정지을 수 있을 것 같다. 양산군 동면 내송리에서 전해 온 이 학춤은 정월 대보름이나 팔월추석은 물론 이 이외에도 부락 경사가 있을 때마다 공연을 볼 수 있었는데, 통도사에서는 1935년경부터 이 학춤의 자취가 없어지고 내송리(內訟里)의 민간계(民間系) 학춤만이 겨우 명맥을 이어온 것이다.”그러나 국가무형문화재 지정이 그에게는 평생의 숙원이었지만 1976년 김덕명의 학춤이 문화재지정에서 보류되었다. 그의 학춤이 보류된 이유로는 사찰학춤의 사찰계의 단절과 민간(재인)계로의 명맥 전승, 명칭의 불확실성(양산사찰학춤, 사찰학춤, 양산학춤 등) 과거 친구의 권유로 동래야류의 이수자에 등록된 것이 사적인 민원으로 영향을 미친 것 등을 들 수 있겠다. 물론 그의 학춤은 조사과정에서 통도사 주지승을 지낸 김말복(金末福)을 중심으로 월하(月下)스님, 성파(盛波)스님, 김동만(金動萬)등 증언자들을 통해 전승경로가 이미 확인되었던 것이며, 양산사찰학춤이란 명칭도 학춤이 양산 통도사에서 전승된 춤이라는 이유에서 발굴조사자들이 정한 것이었다. 전문위원들이 그의 학춤조사를 위해 생존한 증언자들을 찾아다니며 채록할 때 통도사에서 비중이 큰 스님(경봉스님)의 증언도 포함되었다. 그러나 번복된 증언이 반대 세력을 통해 제출되었고, 경봉스님의 고백으로는 누군가의 말을 듣고 시키는 대로 번복했는데, 그렇게 해야만 김덕명에게 유리한 일이라고 믿었다는 것이다. 그로 인해 전문위원들이 조사 보고한 학춤은 지정 심의에서 보류되고 만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김덕명은 1977년 12월 8일에 문화계의 인사들이 모인 자리에서 ‘양산사찰학춤’의 특별 강습회 및 실연을 선보이게 되었다.여기에 참가하였던 무용평론가 박용구는 "묻혀있는 우리춤이 제대로 발굴만 되면 훌륭하고 좋은 점이 이와 같이 다양하다”고 감탄했으며, 역시 무용평론가인 조동화도 "어찌 인간으로서 그토록 잘 출 수 있는가?”하며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특히 예능보유자 김천흥도 흥에 겨운 나머지 그가 춤을 출 때는 손수 장고를 잡으셨다고 하며 덩실덩실 같이 춤을 추실 때도 있었다고 전한다. 그때까지는 동래야류에도 친분을 유지하고 하고 있었지만 지역적인 대립으로 인하여 중도에서 인연을 아주 끊고 말았다.그리고 비록 무형문화재 지정은 보류되었지만 양산사찰학춤 발굴조사로 인하여 김덕명은 중앙의 원로예술인들의 관심을 더욱 받게 되었고, 동연배의 예술인들과 교제하며 입지를 넓혀가는 계기가 마련되었다. 특히 김천흥과 성경린(成慶麟, 1911~2008, 이왕직 아악양성소 수료, 국악원장 역임)은 그의 학춤에 매료되어 영남지방의 독특한 덧배기춤을 보급하는데 도움을 주고자 노력했다. 그를 중앙무대의 예술인들에게 널리 알릴 수 있었던 직접적인 도화선은 1976년 4월 16일 서울YMCA에서 한국문화예술진흥원 특별 초청으로 시연(양산학춤)을 갖게 되면서부터였다. 1976년 6월 3일 주위의 권유로 제2회 전주대사습대회에 52세의 나이로 경남 춤꾼으로 출전했고, 심사위원인 김천흥, 최현, 김숙자 등은 이미 서울 시연회에서 그의 춤을 보고 탄복한 바 있다. 양반춤에 내재된 남성의 멋이 담긴 춤사위로 관객들의 마음을 사로잡게 되면서 장내가 떠들썩할 정도로 인기몰이를 했다. 심사위원들이 그를 찾아와서 격려할 정도였고 그의 춤이 경연대회에서 큰 영향을 미친 것만은 분명한 것이었다. 그 후, 1976년 12월 8일 한국문화예술진흥원의 초청으로 2차 시연회를 갖게 되면서 그의 춤은 전승보급에 발돋움하였다. 그가 ‘교방춤’(교방타령굿거리, 교방 살풀이, 교방양반춤)이란 명칭을 처음 사용하면서 오늘날 무용가들이 흔히 사용하는 ‘교방’ 명칭을 유행시킨 춤꾼이라고도 할 수 있다. 1977년 4월 13일 서울 YMCA 제3회 전통무용 발표회에서 춤을 추었을 때는 400여명의 관객이 모두 찬탄의 박수를 아끼지 않았으며 그때 춘 춤은 양산사찰학춤을 비롯한 지성승무, 한량무 등이었다. 그 뒤 한양대학과 이화여대에서 10여 일 간의 강습회를 갖기도 했고, 같은 해 6월6일에는 양산에 있는 양산극장에서 방위성금 모으기를 위한 고전무용 발표회를 열어 많은 사람들의 호의적인 반응과 함께 호평을 듣기도 했다. 그의 춤에 대한 평으로는 1976년 11월11일자 국제신문에 "양산사찰학춤 문화재 지정설”이라는 제목으로, 1977년 6월 6일자 부산일보에 "20사위에 깃든 庶民들의 애환”이라는 제목으로 소개된 바 있고, 1978년 『산업한국』 3월호에서는 "양산학춤에 대한 역사적 고찰 및 문화재 지정설”이라는 제목으로 각각 소개된 바 있었다. 1977년 7월에는 진주무용인들의 청을 받아 진주 민속예술보존협회의 전통무용부문 선생으로 제자들을 가르치기 시작했으며, 1978년 4월에는 진주시립국악원에서도 전통무용을 담당하여 가르쳤다. 11월9일에는 개천예술제 경상남도 민속예술경연대회 최우수상을 받음으로써 그의 한량무가 1979년 5월 2일 경상남도 무형문화재 제3호 ‘한량무’로 지정되고 예능보유자로 인정받기에 이르렀다. 이때 본인뿐만 아니라 같이 한량무를 춘 8명의 무용가들도 모두 예능보유자로 지정되도록 노력했는데 그 출연자들은 김덕명(한량), 성계옥(승려), 정행금(각시), 정필순(마당쇠), 서정남(별감), 김연이(주모), 최금순(상좌), 김정애(장고)등이었다. 이밖에도 그에게 춤을 사사받은 제자로는 조을주, 박계현 등이 있다. 하지만 그에게는 본인의 평생 목표인 양산사찰학춤만이 뇌리 속에 자리 잡고 있어 양산사찰학춤의 지정보류는 기쁨보다는 아쉬움만 더했다. 이어 1979년 11월 26일에는 서울 국립극장 소극장에서 전통무용 발표회를 가졌는데 레퍼토리는 양산학춤을 비롯한 한량무, 양반춤, 타령, 굿거리, 지성승무, 나래무(살풀이), 잉어춤 등이었다. 이때에도 그의 춤을 본 김기수(국립국악원 원로사범, 보유자)는 "이것이 춤의 오리지날”이라고 극찬하였다고 한다. 이후 그의 활동은 무용에 대한 그의 의지와 욕망에 비례해서 점점 발표회나 전수에 열정을 쏟게 되어 1980년 5월에는 80불교 봉축제의 공연을 가졌고, 8월에는 진주에 "교방청 김덕명 전통무용 연구소”를 냈다. 또한 올바른 전통무용을 후세에 전수하고자 1981년 1월 9일 부산에도 전통무용 연구소를 내기에 이르렀다. 부산과 진주의 연구소를 오가며 제자들을 가르치던 그해 11월 23일은 일본 제총산(帝塚山) 대학의 초청으로 우리의 전통무용을 공연하여 그곳의 유일한 일간지인 요미우리신문에 "한국의 무형문화재 예능보유자 김덕명!”이라는 제목으로 호평을 받았으며, 1982년 1월 10일에 발간된 계보(季報) 제총산(帝塚山) 대학에는 청초하고 아름답고 우아한 춤이라고 특집으로 다루었고 그 학교의 교과서에까지 그의 춤에 관한 부문을 서술하고 있다고 한다. 그 후 1982년 3월부터는 부산전문대학 무용과 민속무용 강사로 학생들을 가르치게 되었다. 이렇듯 그의 무용에 대한 평가가 퍼져나가게 되자 부산지구 J.C신문은 1982년 6월 30일자에 "양반춤에 대한 소고”라는 제목으로 일면 전체를 그의 기사로 채우기에 이르렀다. 또한 그의 춤이 사찰무용에서부터 시작했기 때문에 불교 관계의 제반 공연에도 참가했던 바 1982년 11월 서울 세종문화회관에서 있었던 불교협회 주최 자선공연에도 참여하여 양산사찰학춤과 양반춤을 추어 관객들에게 감동을 주기도 했다. 그는 늘 학춤을 출 때면 그 스스로가 학처럼 추는 것이 아니라 춤추는 사람이 학이 된다는 중요한 사실을 잊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러다가 1996년에도 구희서, 김옥진 조사자에 의해 ‘양산학춤’으로 칭하는 것이 타당하다하여 명칭을 변경하여 다시 제출하여 학춤이 문화체육부 관보에서 지정을 위한 예고까지 나왔으나 동래학춤과 병행해서 전승과정을 탐문 조사를 하던 중 계보에서 양산권번 고문인 영남의 한량 이주서(李周瑞, 1865~1930)가 동래학춤의 전승자로 부각되어 나타나게 되어 학춤 전승이 부산 동래와 양산으로 분류되었지만 다 같이 이주서(李周瑞, 1865~1930)로부터 전승된 것은 아닌가하는 의구심으로 나중에 지정 여부에 논란의 단서가 되었고, 또 다시 주위의 방해(동래 M씨가 문화재청에 찾아가 민원 제기)로 인하여 역시 철회 부결되고 말았다. 이렇게 김덕명은 문화재 지정에 있어서 두 번의 실패를 겪게 되면서 좌절의 늪에 빠지게 되었다. 김덕명 전승춤의 전승계보 김덕명(金德明,1924~2015)은 경상남도 양산에서 태어나 8살(1932)에 범어사에 들어가 불가(佛歌)를 부르거나 불교(佛敎)의식무를 흉내 내었다. 김덕명이 전문적으로 전수받은 춤 계보는 4가지로 정리되며 그중 민간춤놀이는 마을전승이기에 계보로 말할 수 없다. 첫째, 사찰에서 전승하던 학춤은 고종 때부터는 이월호(李月浩, 1825년생, 당시 어산종장)―김설암(金雪岩, 1885년생)―신경수(辛景壽, 1893~1965)―양대응(梁大應, 1897~1972, 통도사 주지) 스님으로 계맥이 이어져 김덕명 씨가 보유하고 있다. 그때 양대응스님은 조부 김두식(金斗熄)과 절친한 사이로서 양산학춤, 지성승무, 바라춤의 명인이었는데, 1940년 16세에 이 춤들을 전수받았다. 또 당시 해인사에 있다가 통도사에 온 신경수스님으로부터 승무와 학춤을 전수받았다. 즉 두 분(신경수, 양대응)의 스님으로부터 사찰춤을 전수받았다. 둘째, 민간인으로부터 전수받은 재인춤은 통도사 소속의 민간인 김두식(金斗熄, 1843~1929, 김덕명 조부)이 곡수(穀數, 수사찰 재산 관리자)로 있으면서 학춤을 전수했는데 민간인 안화주(安化周, 1894~1965), 황종렬(黃鍾烈, 1897~1957)이 전수받아 다시 김덕명이 이들로부터 배운 것이다. 셋째, 기방춤으로 이주서(李周瑞, 1882년생)―고수길(高壽吉, 1888~1965, 당시 양상 권번 원장)으로 이어지는 춤맥을 전수받게 된다. 양산권번의 권번장(춤사범)인 고수길(高壽吉, 1888~1965, 동래권번에서 양산권번이적)로부터 그의 딸 고채봉(高綵峰)과 고채숙(高綵淑, 기명은 山月)과 함께 한량무, 교방양반춤, 교방타령무, 신라장검무, 교방진연무, 태극무 등을 배웠으나 사찰춤과 춤바디가 달라 애를 먹었다. 이어서 개성권번에서 양산권번으로 이적해온 김농주(金農宙, 1905~1955)와 오누이를 맺으며 기생소고무, 타령춤, 굿거리춤 등을 배웠고, 군무(群舞)로는 장원급제를 축하하기 위하여 40~50여명의 인원이 함께 추는 부마도위춤도 배웠다. 넷째, 그가 복원한 민간춤놀이들은 딱히 전승자를 밝힐 수 없는 지역민들이며 김덕명은 탈춤과 토속민요 등 향토민속적인 기예능도 뛰어나 지역민속을 발굴하는데 참여하여 발굴한 것들이다. 김덕명의 전승춤 종목과 특징 김덕명의 춤은 사찰춤과 권번춤과 민간춤으로 크게 3계통으로 대별된다. 그는 일반인으로 사찰춤을 계승한 사람이며, 남성으로서 기생들의 춤인 권번춤을 전승받았다는 점이 다른 춤꾼들과는 다른 특이점이다. 김덕명의 전승춤 27종은 크게 3계통으로 기방계(10종), 사찰계(4종), 민간계(13종)이 있다. 1. 기방계춤으로는 한량무(한량, 기생, 승려, 주모, 별감, 상좌, 사환 등), 교방타령춤, 교방양반춤(호걸양반춤), 교방진연무, 기생소고춤, 굿거리춤, 신라장검무, 태극무, 부마도위춤(군무), 장기춤. 2. 사찰계춤(재인계와 혼합)으로는 사찰학춤, 지성승무, 연등바라춤(탑돌이춤), 연등나례살풀이춤. 3. 민간계춤으로는 성주풀이춤, 쾌재나 청청춤, 각설이타령춤, 신노심불노춤, 농사요놀이춤, 장원급제놀이춤, 기우제놀이춤, 망시꼽배기놀이춤, 가락오광대놀이춤, 석전놀이춤, 망부석사록놀이춤. 회심곡춤, 떳배기춤(得排鬼춤). 김덕명의 춤사위 특징은 첫째, 특별한 형식에 매이지 않고 자연스러우며 정신 집중과 무게, 관절조절을 통해 안정적인 자세로 이루어지는 동작이라는 점이다. 단전을 이용한 깊은 호흡과 기가 조화를 이루며, 발을 디디고 누르는 굴신동작의 걸음걸이에서 관절의 유연함이 나타난다. 남성의 투박한 멋을 지니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그의 춤사위는 사찰춤과 권번춤에 두루 정통하여 지극히 예술적으로 승화된 춤이다. 쌍벽을 이루는 동래학춤은 이주서로부터 김귀조, 김문수, 김필상, 최순백, 김태현, 유봉오가 학춤을 사사 받았고 김귀조는 아들인 김희영에게, 김문수는 아들인 김동원에게 각각 전수하였으며 작고 이전에 김희영이 외조카 이현경에게 전수하였으나 중단되었고 김동원이 유일한 예능보유자로 지정되었다. 또한 2009년 현재 구음보유자로 유금선이 지정되었으며 김태형, 이성훈이 기능보유자 후보로, 김정양 이광호가 전수조교로 꾸준히 전승하고 있다. 이에 비해 양산사찰학춤은 1976년 당시 무형문화재보고서 조사자 서국영의 기록에 의하면 김말복이 증언하기를 1880년대 이후 이월호(1852~?), 1983년대부터는 김설암(1885~1970), 1920년 이후에는 신경수(1893~1965)와 양대응(1897~1972)스님의 학춤을 직접 목격하였다고 하며, 신경수는 사하부락인 신평리에 나와서 남소석(1904~1960)의 꽹쇠 장단에 맞추어 학춤을 추었다는 사실을 밝히고 있다. 「양산사찰학춤」이 통도사에서 전승되었음은 민간인의 증언을 통해서도 알 수 있다. 윤장우씨는 1938년부터 통도사 광원에 있으면서, 1945년까지 절에 있었는데 스님들 중에서 끼가 있는 스님들이 사하부락인 평산리 주막에서 춤과 소리를 하는 장면을 직접 목격하였다고 증언하였다. 사하부락인 신평리에서 태어나 하북면의 면장이 된 지명구씨는 어릴 적 사하부락인 신평리에서 양대응(1897~1972)스님이 장구장단에 맞추어서 학춤을 추는 것을 직접 목격하였다고 증언하였다. 또한 통도사에 있었던 신경수(1893~1965) 스님은 당시 명무 승려로서 학춤을 잘 추었다고 밝히고 있다. 이렇듯 사찰에서는 대제(영산재 등)를 지낸 후 신도들의 흥을 돋우기 위해 사찰경내 마당에서 사찰의식 외에 여흥을 펼치는 사례가 많았다. 이때 외부에서 놀이꾼을 초빙하기도 하고 또는 장기가 있는 승려가 직접 춤을 추기도 하였다. 마지막으로 김덕명(1924~2015)은 통도사에서 신경수, 양대응 스님에게 「양산사찰학춤」을 배웠다. 남사당의 북소리에 이끌려 동네잔치에서 춤을 추는 김덕명을 부모는 아들이 혹여 광대라도 될까 통도사로 보냈으나 오히려 통도사에서 「바라춤」, 「지성승무」, 「장검무」, 「학춤」 등을 배웠다. ‘학산’ 이라는 호는 절에서 나올 때 통도사 보화스님이 지어 주었다고 한다. 학춤공부를 많이 한 덕명이 나무 위에서 학이 날듯, 학춤을 잘 춘다는 뜻이었다. 위의 계보 외에 「양산사찰학춤」을 추었던 스님들은 더 많았다고 알려지고 있으나 기록을 찾아 볼 수 없고 점차 사찰계에서 학춤의 자취가 사라지고 현재는 추어지지 않고 있다. 둘째, 민간(재인)춤의 형성 배경을 보면 다음과 같다. 무형문화재 보고서 제 122호에 따르면, 처음 민간으로 전승되어진 과정은 김두식(金斗熄1843-1930)에 의해서였다. 김두식은 당시 곡수운반 관계로 약 40세에 통도사를 출입했으며, 사찰에서 학춤을 전수받아 추었다. 이 춤을 다시 동부락 거주 황종렬(黃鐘烈,1897-1957)이 전수받았고 이어 김덕명(金德明)에게 전해졌다. 동면의 황종렬은 춤에 대한 능력이 뛰어난 사람으로 동면 내송리 마을의 행사가 있을 때마다 주도적으로 춤을 통해 흥을 도왔다고 하며 양산 출입도 매우 빈번했다. 특히 내송리에 있는 주점에 자주 출입하면서 가무를 즐겼다고 전해지고 있다. 위의 전승계보 외에 양산에는 학춤을 즐겨 추는 사람이 많았다. 당시 양산에서 명무수로 이름난 이주서(1869-1944)란 사람이 학춤을 잘 추었으며 당시 이 춤이 서상건(1982-1967)에게 전승되었다며 1976년 당시 조사자인 서국영에게 증언하였다. 서상건씨는 양산에서 가장 큰 포목점(일신상회)을 경영하면서 매우 부유하게 생활하였고, 풍류를 즐겼던 사람으로서 여러 가지 춤을 즐겨 추었다. 그래서 양산에서는 그의 별호가 "춤 잘 추는 서상건”이란 소문이 생겨났고 주로 동래온천장에 출입하면서 가무를 즐겼다고 우성렬(1930- :서상건의 먼 친척)씨가 증언하였다. 이렇듯 양산에는 여유로운 풍류객들이 많았음을 유추할 수 있다. 김두식, 황종렬에 이어 김덕명은 통도사에서 학춤을 배웠으며 민간에서 또한 전수받아 꾸준한 활동과 「양산사찰학춤」의 보존과 보급에 힘쓰고 있다. 감덕명이 증언(2015. 5.16, 김덕명자택에서)한 지성승무에 대한 배경설화는 다음과 같았다. 지성승무는 두 가지가 있는데 군무와 독무로 춘다. 김덕명 선생님이 중언한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어느 사찰의 스님이 불도를 닦다가 탁발하려 동네에 내려갔는데, 동네 어구의 밭두렁에서 어린아이가 풀을 뜯어먹고 있어 의아하게 생각하여 아이를 업고 동네를 들어가니 마을사람들이 돌림병으로 모두 죽고 아이만 살아서 먹을 것이 없어 밭두렁에서 풀을 뜯어먹게 된 것을 알게 되었다. 스님이 아이를 데리고 사찰로 돌아와 상좌승으로 키우게 되었다. 그 후 상좌가 두 명(악기다루는 어산상좌, 수발과 교육하는 상좌)이 있었다. 그 후 노승은 불법해탈을 위해 토굴에서 여러 해를 불법을 깨닫기 위해 참선을 하며 불공을 드리고 마치고 돌아서 나오던 중 연유도 없이 그 자리에서 쓰러지고 말았다. 뒤에서 함께 불공을 드리던 상좌가 심히 놀라 동분서주하며 온갖 정성을 다해 간호를 하였으나 백약이 무효하고 상좌의 보살핌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노승은 숨을 거두고 말았다. 노승의 시신을 끌어 앉고 통곡을 하던 상좌도 너무 슬픈 나머지 그만 기절하고 말았다. 어려서 데려다 키운 상좌는 부모님이나 다름없는 노승이 쓰러지니까 슬픔이 깊어 기절해 같이 쓰러진 것이다. 상좌가 기절하여 비몽사몽간에 백발도승이 검은 지팡이를 짚고 구름을 타고 하늘에서 내려와 지팡이를 쿵쿵 두드리며 "네 이놈 상좌야! 노스님은 너의 불거지운명(不居之運命)로 너의 살기(殺氣)에 스님이 죽어가고 있는데 너마저 누워 있으니 한심하구나! 빨리 일어나 스님을 구해라!” 하고 도승이 지팽이로 "꽝!”하고 땅을 치는 호통소리에 놀라 상좌가 벌떡 일어나 "소승의 스님을 살려 주십시오”하고 애원을 하며 세세사정을 말하니 "허허, 너의 갸륵한 마음이 기특하니 노스님을 살리는 비법과 방도를 가르쳐 줄 테니 그대로 이행하거라” 그러자 순간 몇 명의 악단이 좌우로 둘러앉아 장단이 울려 퍼지고 도승은 가락에 맞춰 춤을 추시는 것이었다. 그리고 "내가 추는 춤을 잘 보아라. 이 춤을 너의 노스님 앞에서 정성껏 추게 되면 분명코 살아날 것이다.” 이어 말하기를 "그러나 너는 나와 몇 가지 약조를 꼭 지켜야 한다. 노스님이 살아나시거든 내가 전해준 그 승복을 벗어 북에 걸어 두고 소생하신 노스님을 부축도, 말도 하여서는 안 된다. 그리고 그곳에 잠시도 지체 말고 노스님과 바로 하직하고 남으로 계속 내려가면 깊은 산골짜기에 암자가 있을 것이니, 그 암자에서 열심히 공부하면 필경 성불할 것이다.”라고 했다. 영문도 모르고 있는 상좌에게 도승은 다시 "노스님과 너는 숙명적으로 액과 악이 맺혀 영원히 동거생활이 불가능하리라. 만약 나의 명(命)을 어기면 너와 노스님은 변을 당할 것이다.”라고 말하고 홀연히 사라졌다. 놀라 깨어난 상좌는 선몽이 분명하며 옆에 도승이 준 승복과 염주가 있어 착용하고 노스님을 살려야한다는 일념으로 어려워 잘 생각나지 않는 춤이지만 정성껏 춤을 이어 추었다. 그러자 노스님의 얼굴에 화색이 돌고 몸을 돌리며 긴 숨을 내어 쉬며 깨어났다. 환희에 차 기쁨의 춤을 추며 노스님을 부축해 일으키고 싶었지만 도승의 명을 염두에 두니 앞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노스님을 홀로 두고 떠나야 하는 상좌의 마음은 오죽했겠지만 등지고 떠나 일러준 남으로 가서 암자에서 노스승을 살린 고귀한 이 춤의 연유를 고이 간직하여 후세에 물려주며 이르기를 "이 춤을 지성껏 전수시켜 만대에 전하라” 이르렀고, 이름 하여 '지성승무'라고 전했다.” "나(김덕명)는 춤이라면 좋아서 승무든 학춤이든 열심히 배웠다. 하루는 내가 잘 아는 통도사 스님(당시 대처승, 단청제작)이 내려와 보시고 승무 내용이나 아나? 하시면서 한 시간에 걸쳐 승무설화를 이야기를 해주셨고, 스님 급수에 따른 가사장삼에 대한 복색이야기도 해주셨다. 당시 금강암(지금은 비구니들이 기거하는 암자)이라는 암자가 있었는데 거기에는 부인이 기거하였다. 그때 이동안(수원화성재인청 소속, 발탈보유자)이 부산에 내려와 활동할 때인데 내 스승이라 하면서 암자 작은방을 소개하여 공짜로 기거할 수 있게 해주고 살림과 음식장만을 내가 다해주었다. 광대줄타기를 했는데 기능이 약해 그 후 다시 서울로 갔다.”한편 향토민속예술의 발굴활동에서도 커다란 역할을 하여 ‘진주의 한량무’, ‘김해의 석전놀이’, ‘가락오광대’, ‘양산의 웅상망시곱배기놀이’등이 그 결실이라고 할 수 있다. 김덕명이 결코 춤을 떠날 수 없었던 춤 인생은 세속적인 고초를 겪으면서도 단념하지 않은 운명이었다. 그렇게 걸어온 그는 남성의 멋을 잃지 않았고, 굵은 선과 힘, 부드러움이 조화된 그만의 특출한 춤사위를 지켜왔다. 오늘날 남성춤이 중성화 또는 여성의 모습이 강하게 묻어나온다면 그의 한량무와 학춤은 남성의 장점을 표출시킨 것으로 남성춤의 지존을 지킨 마지막 사찰춤과 영남춤꾼이었다. 김덕명 춤사위 성향과 특징 김덕명의 춤은 크게 두 가지 계통을 잇고 있다. 우선 사찰계통춤의 춤이며, 다음은 기방계춤이다. 그렇다면 그이 춤은 어떤 계통의 성향일까? 전수내용적으로는 사찰계와 기방계의 혼합성향이지만 그의 인생 후반에 나타난 춤 성향은 기방계통보다는 사찰계(재인계)적 성향이 월등이 높게 나타나고 있었다. 물론 어린 시절에 김농주로부터 엄격한 기방춤 기법을 몸에 익혔지만 성장하면서 기방춤의 교태미는 사리지고 남성성향이 큰 재인계적 성향으로 발전한 것이다. 게다가 거구의 체격에다 탈춤에서 나타난 영남춤의 덧배기춤적 특성을 강렬하게 품고 있어 국내 전통무용가 중에서 가장 영남성향과 재인성향을 간직한 춤꾼이다. 그런데 또 하나 중요한 사실은 기방계적 섬세함이 덧씌워져 있어 거친 남성성만 가진 것이 아니라 올곧은 전통춤 즉 기방춤의 섬세한 기법이 몸에 배어나 춤집이 크고 활기가 넘쳐도 투박한 마당춤이 따를 수 없는 표현력을 지녔다. 비교의 예를 들자면 동시대 같은 남성무용가라도 이매방은 어린 시절 처음 입문한 춤이 기방춤(권번 함국향의 첫 가르침)으로 형성된 춤바탕이었다. 그 후 재인춤인 이대조, 박용구의 춤들을 익혔지만 이미 몸과 마음의 성향이 기방계로 고착된 춤성향이 평생춤으로 자리매김한 것이다. 그래서 이매방춤은 기방계통성을 지켜온 ‘춤속’과 ‘춤바디’를 평생 지켜 전승한 것이다. 반대로 김덕명은 맨 먼저 체득한 춤이 사찰계춤이다. 사찰계의 특성은 재인계적 성향과 불교의례적 성향이 혼합된 것이지만 김덕명은 범패작법을 주로 행하는 어산승(魚山僧)이 아닌 민간인이었기에 춤성향에서 불교의례적인 성향은 약화되고 재인계적 성향만이 남게 된 춤성향이 형성된 것이다. 게다가 김농주라는 개성권번에서 활동한 명기의 가르침도 어린 시절에는 기초로서 가능했지만 성인이 되면서는 춤의 본성이 나타난 것이다. 마치 궁중의 무동들처럼 어린 시절에는 중성적인 성향으로 여성적인 고운 춤을 익혔어도 사춘기를 넘어서면 남성성향이 나타나 악사로 전향하거나 퇴출한 것과 같은 현상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또 하나 그간 문제가 되었던 동래학춤과 양산사찰학춤의 전승계보에서 윗대에 같은 양산권번 고문인 영남의 한량 이주서(李周瑞, 1865~1930)가 동래학춤의 전승자라는 점으로 양쪽 학춤의 실존성은 함께 증명이 되지만 중요한 것은 전승과정에서 성향이 아주 달라졌다는 사실이다. 즉 현전하는 동래학춤과 양산학춤을 비교해볼 때 동래학춤은 동래권번을 중심으로 전승되다보니 기방계적 성향이 강해졌고, 동래는 부산이라 춤추는 인적자원이 풍부해 군무형태로 전승되었다. 이에 비해 양산은 시골이라 춤추는 인적 자원도 부족하고 통도사를 중심으로 전승한 사찰춤으로 재인계적 성향이 강화된 춤이다. 따라서 두 지역 학춤을 보면 동래학춤은 기방계적 성향에다 동래기생 유금선(1931~2014)보유자의 구음소리가 흥을 돋우어 곱고 부드러운 날개춤사위로 여러 마리 학이 어우러지는 ‘기방계적 군무학춤’으로 발전하였고, 양산학춤은 사찰중심으로 춤집도 크고 활기 넘치는 춤사위로 전승한 ‘사찰(재인)계적 독무 또는 쌍무 학춤’으로 차이가 있다. 학춤사위의 구체적인 표현에서도 동래학춤은 학의 형상을 은유적이고 상징적으로 표현한데 비해 양산학춤은 학의 생태성과 겉모습을 직접적으로 표현한 춤사위가 많다는 점이다. 즉 동래학춤은 동래야류의 양반춤사위 중에 학춤과 유사한 배김사위, 옆걸음사위, 활갯짓 뜀사위 등과 모이 줍는 사위, 외발사위 정도이고 양팔을 어깨 위로 들고 추는 날개사위가 대부분을 차지하며, 발사위도 한쪽다리를 구부려들고 다른 쪽 다리는 길게 뻗어 학의 긴 자태를 나타내는 발사위 특징을 보이며 주무수와 조무수가 윤무형태의 군무로 대형변화가 많은 점이 특징이다. 이에 비해 양산학춤의 팔사위는 학날개, 학머리로도 표현하고 땅에 내려앉는 사위, 위엄을 보이는 사위, 좋아서 으쓱이는 사위, 먹이 쪼는 사위, 놀라 펄쩍뛰는 사위, 짝을 어르는 사위, 동사위, 비상하는 사위 등 24가지 학의 습성을 나타내는 학춤사위가 다양하며 발사위는 양다리를 균등하게 구부리며, 독무나 군무로 출 때도 앞으로만 진행하거나 시계반대방향으로만 진행하는 등 대형보다는 학춤사위에 치중하여 동래학춤과는 사뭇 다르고 다양하며 예술성이 높고 활기가 넘친다. 또한 양산권번 고문인 한량 이주서(李周瑞, 1865~1930)가 동래권번으로 가서 학춤을 전승시켰다고 하는 것은 학춤의 본류가 양산(통도사)이고 지류가 동래라는 점을 입증하는 것이며, 양산과 동래의 춤전승 환경이 달라 서로 달라진 점도 무시할 수 없는 지역적 차이를 보이고 있다. 즉 동래는 이주서의 학춤 영향력이 절대적이고 단일적 계보(이주서>김귀조, 김문수>김희영, 김동원>유금선, 김태형, 이성훈)였다면, 양산은 이주서 외에도 동시대 전승자(김설암, 김두식, 고수길)도 많았고, 계통 계보도 사찰계(김설암>신경수>양대수>김덕명), 재인계(이월호>김두식>안화주>황종열>김덕명), 기방계(이주서>고수길>김농주>김덕명) 등 다양하였기에 학춤의 풍부한 내용과 전승력을 가질 수 있었던 것이다. 결국 동래학춤과 양산학춤은 같은 영남지역춤이라 할지라도 춤성향과 춤사위 특징이 많이 달라 무형문화재로 양산학춤을 지정하는데 동래학춤이 걸림돌이 될 수 없다는 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양산사찰학춤이 국가무형문화재로 지정하여 관보까지 올랐으나 동래측의 반발로 무산된 것은 한국전통춤 중에서 가장 남성다운 학춤(한량무 계열)이 지정되지 못하게 되어 여성성이 강한 살풀이춤, 태평무, 승무 등만이 편중되는 역사적 오류를 낳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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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땅에, 춤이란 무엇인가’& 이애주의 춤 생각’이 땅에, 춤이란_이애주의 춤 생각을 엿본다다음으로는 책나눔이다. ‘승무’에 녹아있는 인간과 자연 천지 생명의 원리를 밝혀 승무에 대한 ‘원형이정(元亨利貞)’의 철학적 해석을 다진 책 ‘승무의 미학’(개마서원, 2022)(2022년 세종도서 학술부문 선정)과 고구려 춤의 구조와 춤의 미적 가치 그리고 상징 체계까지 파헤친 ‘고구려 춤 연구’(개마서원, 2022)에 이어 고 이애주 선생이 남긴 우리춤에 관한 연구글 모음집인 ‘이 땅에, 춤이란 무엇인가’(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2023.5)와 ‘이애주의 춤 생각’(개마서원, 2023.5)을 이애주문화재단이 펴냈다.이 땅에, 춤이란 무엇인가는 이애주 선생이 1970년대부터 세상을 떠나기 직전까지 과연 이 땅에서 춤을 춘다는 것은 무엇이고 춤이란 무엇인가에 대해 스스로 묻고 대답하는 치열한 구도와 같은 여정을 돌아볼 수 있는 춤에 대한 연구 작업을 모아 모교이자 교수로 재직했던 서울대학교 출판문화원이 발간했다. 또 이애주의 춤 생각은 선생의 춤 창작 원리와 한성준-한영숙-이애주로 맥이 이어 내려온 우리춤에 대한 깊은 성찰과 생각을 강연 원고, 팸플릿, 사진, QR 영상 등 자료를 통해 입체적으로 엿볼 수 있게 구성됐다. 이애주 선생의 춤을 통한 삶과 예술의 시원, 실천, 염원을 확인할 수 있는 이 두 권의 책을 이애주문화재단은 헌정례를 마치고 나눔굿 참석자들에게 떡과 밥, 술나눔과 함께 책나눔 한다.이애주(李愛珠, 1947~2021)는 어린 시절 이왕직 아악부(국립국악원의 전신)의 아악수장 김보남에게서 춤을 익혔다. 서울대학교 진학 후 국가무형문화재 제27호 ‘승무’ 보유자인 벽사(碧史) 한영숙을 사사(師事)했으며, 1996년에는 스승에 이어 2대 예능 보유자로 지정됐다. 1987년 6월 항쟁의 한복판에서 온몸으로 시대를 가르는 춤을 추어 춤의 사회적 과제를 부각했다. 이후 전통춤 정립과 후진 교육에 매진하는 한편, 민족춤의 시원을 찾아 각고의 노력을 기울였다. 서울대 교수, 경기아트센터 이사장을 역임했으며, 2021년 이애주문화재단을 설립한 뒤 같은 해 5월 10일 타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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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윤선의 남도문화 기행 (69)이윤선(문화재청 전문위원) 도리 기둥을 한 여섯 간(약 20평)의 조선 기와집이었다. 방이 셋이고 봉당, 대청, 정지 등이 있었다. 주위에는 26~27호 정도의 당골 집안이 살고 있었다. 건물 안에는 집지을 때의 각서가 기둥에 새겨져 있었다. 무신도나 초상들이 걸려있지는 않았다. 조선말엽에 이 건물을 중수하기 위해 헌금을 한 한참사, 임참사, 박참사 등의 이름이 걸려있을 뿐이었다. 지난 토요일 나주 신청문화관 개소식에서 발표한 목포대 이경엽 교수의 "왜 신청인가, 무엇을 어떻게 주목할까"라는 글의 한 대목이다. 신청을 진도에서는 장악청이라 했다는 '한국민속종합조사보고서'를 인용한 정보다. 설명은 이어진다. 장악청에 출입하던 사람들을 '고인, 공인, 재인'이라 했다. 노래를 부르고 악기를 다루는 사람들에 대한 다른 이름들이다. 주야를 막론하고 항상 십여 명이 모여 예능을 닦고 놀이를 하였다. 당골 무계이기 때문에 무업에 종사한 것도 주요 일과 중의 하나였다. 장악청의 대동계를 이루는 사람들은 누구나 참석하여 음악기량을 익혔다. 신청에서 사용했던 악기는 북, 장구, 쇠, 거문고, 가야금, 양금, 피리, 젓대, 해금 등이었다. 향유한 노래는 판소리 단가를 비롯해 춘향가, 심청가, 적벽가, 흥보가, 수궁가 등이었다. 전북대 정회천 교수가 흥미로운 발상을 추가했다. 다른 지역에서 신청이라 부르던 공간을 왜 진도에서는 장악청이라 했을까? 삼별초에 의해 또 하나의 정부가 세워졌던 곳이기에 고려 이래의 전통이 이어져 온 것은 아닐까 하는 문제제기였다. 장악청은 삼국시대부터 고려와 조선을 거쳐 음악을 담당하던 국가기관 장악원을 연상하게 하기 때문이다. 장악원(掌樂院)은 고려시대에는 태악서(太樂署)라 하다가 전악서로 바꾸었고, 조선 초기 아악서, 전악서, 악학, 관습도감을 합쳐 세조 12년(1466)에 장악서로 통합하였다. 예종 원년에는 다시 장악원으로 이름을 바꾼다. 신청을 재인청, 광대청, 공인청, 공인방, 악공청 등 다양한 이름으로 부르던 내력을 상기해보면 진도의 장악청을 고려 말까지 소급하는 상상이 그리 엉뚱한 것은 아니다. 이런 전통이 있어서 현재 진도에 국립국악원이 설립된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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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무성 화백의 춤새 (37)<br>김영숙의 '춘앵무春鶯舞' 춤사위춘앵무春鶯舞 춘앵무는1828년 순조의 욍후이자 효명세자의 모친인 순원숙왕후의 보령寶齡 40세를 축하하는 잔치인 진작進爵과 1829년 순조대왕의 보령 40세를 축하하는 잔치인 진찬進饌에서 추어진 궁중무 정재呈才이다. 이른 봄날 새롭게 물이 오른 버드나무 가지 위에서 노래하는 꾀꼬리를 무용화한 것이다. 6자길이의 작은 화문석花紋席 위에서 꾀꼬리를 상징하는 노란빛의 황초삼 일명 앵삼鶯衫을 입고 화관花冠을 쓰고 손에는 오색한삼五色汗衫을 끼고 초록혜草綠鞋를 신는다. 발디딤으로는 땅을 표현하고 한삼을 뿌려서 우주와 팔방을 표현하며 정중동靜中動의 깊이를 춤춘다. 특히 화전태花前態에서는 궁중무 중에서 살짝 미롱微弄을 하도록 허락되어진 아름다운 부분이다. 리아履雅 김영숙金英淑 국가무형문화재 종묘제례악 일무佾舞 전승교육사 (사)정재연구회 대표 (사)아악일무보존회 대표 전, 인천시립무용단 예술감독 전, 중국 항주사범대학교 예술대학 석좌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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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흙의 소리<106>흙의 소리 이 동 희 바람 속에 물 속에 3 어려 황황자화 남산유대 녹명은 시경詩經 소아小雅의 편명篇名들이다. 궁정의 연회와 전례 때의 의식시儀式詩에 풍風 아雅 송頌이 있고 아에는 소아 대아가 있다. 정악正樂의 노래말이다. 앞에서도 몇 번 얘기하였지만. 중추원부사 박연은 또 다른 일로 상언하였다. "태봉胎峯 아래에 백성들의 오두막집을 철거하고 그 전토田土를 폐지하니 지극히 통석痛惜합니다.” 태봉 아래 여사廬舍를 철거하고 농사를 짓지 못하게 하는 것에 대하여 참으로 안타깝다고 아뢴 것이다. 풍수지리설에 닭이 울고 개가 짖고 저자가 열리고 마을에 연기가 나면 은연중에 융성하고, 장법葬法을 상고해 보아도 고금의 경험이 모두 사람이 거주하는 것을 꺼리지 않았다. 신라의 능묘陵墓는 대개 왕성王城 안에 있었고 중국 사람들의 묘는 전원田園의 두둑에 있는 것으로 보아 인연人煙이 모인 것도 길吉한 기운이 되는 것은 의심할 수 없다. 그런데 태실胎室이 인연을 꺼려할 것이 없는데 어찌 태봉의 천 길 아래에 있고 평지 땅인 전원田園과 제택第宅을 모두 남김 없이 철수한 뒤에야 길하겠는가. 이것은 심히 이치가 없는 것이다. 만약 이러한 법규를 세운다면 나라의 전토는 줄어들어 민생의 원망이 그칠 날이 없을 것이다. 태평한 날이 오래 되어 백성들이 번성하여 사람이 많아지고 땅이 좁아지면 한 조각의 빈 땅도 없을 것이다. "백성들을 보호하고 먹는 것을 풍족하게 하는 것도 왕정의 급한 바입니다. 진실로 바라건대 전하께서는 구업舊業을 그대로 허락하시고 옛 사람의 태실의 예와 같이 하는 것이 어떠하겠습니까.” 박연의 상언은 바로 풍수학에 내려 의논하게 하였으며 태봉 근방의 인가와 토전土田의 거리 등 실태를 조사하도록 하였고 태봉의 주혈主穴 산기슭 외에는 일찍이 경작한 토전과 태봉 주변의 사사寺社는 옛날 그대로 하는 것이 좋겠다는 의견을 듣게 된다. 박연은 다시 성주星州 태봉 밑의 민가民家를 철거하지 말도록 상언한다. "백성을 해롭게 함은 중한 일인데 성상聖上의 마음을 힘들게 할까 두려워하여 그대로 있지 못하고 천총天聰을 어지럽게 합니다. 소신小臣의 명예룰 요구하는 계책이 아니고 성상의 덕이 곤궁한 백성에게 미쳐 한 사람이라도 살 곳을 얻지 못하는 자가 없고자 함입니다. 신의 어리석은 마음을 살펴 시행하소서.” 백성을 위한 간곡한 이 청원은 어떻게 되었는지 기록에는 보이지 않는다. 박연의 상언은 그것으로 그치지 않았다. "아악의 종鍾과 경磬의 소리는 처음으로 만들 때에 오로지 죽률관竹律管에 따라서 교정校正하였습니다. 죽률은 가볍고 가운데가 비어서 추위와 더위에 쉽게 감응하므로 볕이 나고 건조하면 소리가 높고 흐리고 추우면 소리가 낮습니다. 이 이치가 미묘하여 일찍이 미리 헤아리지 못하다가 2년이 지나서야 비로소 깨닫게 되었고 사유를 갖추어 동률관銅律管으로 고쳐 만들어 가지고 교정하였습니다. 그러나 정미精微함을 다 하지 못하여 무릇 6년 동안 교정한 소리가 조금 높기도 하고 조금 낮기도 한데 역시 추위와 더위 때문에 변화가 있는 것이니 이 때문에 아악의 소리가 태반이 어울리지 않습니다.” 문종 1년(1451) 4월에 올린 상언이었다. 종과 경을 더운 철이 오기 전에 소리를 교정할 것을 청원하는 것이었다. "지난 무오년戊午年 4월에 제향祭享과 조회악朝會樂의 종과 경을 다 모아서 춥지도 않고 덥지도 않은 철에 모두 교정할 것을 계청啓請하니 이에 ‘올 가을에 다시 아뢰어 시행하라’고 명하셨는데 지금까지 시일을 미루어 왔으니 참으로 작은 흠결이 아닙니다. 빌건대 금년 더운 철이 오기 전에 모름지기 바로잡아서 길이 후세에 전하도록 하소서.” 무오년이면 1438년, 14년 전이다. 세종 임금의 명이었다. 그것을 이제라도 실현시키고자 그 아들 임금 대에 다시 아뢰는 것이다. 이에 대하여 바로 예조에 내려서 의논하게 하였고 예조에서는 가을까지 기다리기를 계청하니 그대로 따랐다. 박연으로서는 마지막 상언이었다. 참으로 길고 끈질긴 상언 상소 상주의 행진이었다. 예악에 관한 것이라고 하였지만 잡박한 개혁의 의지 바로세우고자 하는 집념의 표출이었다. 마당 가운데 넘어진 지게 작대기를 일으켜 세워 놓고자 하는 시골 촌뜨기의 욕망이었다. 모든 일에 시작이 있으면 끝이 있듯이 의욕이 넘치고 너무나도 집요한 그의 그칠 줄 모르던 행진도 멈출 때가 되었다. 그 해 9월 도승지 이계전李季甸이 박연의 병세를 진맥하고 말미〔休暇〕를 주는 일로 인하여 우참찬 허후許詡가 이른 것이 문종실록(9권)에 기록되어 있는데 병 때문이 아니고 일흔 넷 다섯의 늙은 나이 때문도 아니고 아 참, 너무도 엄청난 비운의 소용돌이가 그의 삶의 한 가운데로 몰아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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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흙의 소리<105>흙의 소리 이 동 희 바람 속에 물 속에 2 "가동歌童이 끊겨지지 않는 것은 전날 무동舞童의 남은 풍습에 인연하는 것입니다. 지금 이를 폐지한다면 원묘原廟에서 송덕頌德하는 음音이나 공적으로 빈객을 연향宴享하는 악樂이 어찌 되겠습니까. 신의 망견으로는 가동은 폐지할 수 없으며 세종께서 무동은 혁파한 것은 오로지 계속하기 어려운 때문이라고 하였을 뿐이요 예가 아니기 때문에 없애라는 것은 아니었습니다. 만약 계속할 수 있어 오래 할 수 있는 대책을 얻게 되면 전의 법규를 수복修復하는 성주의 계술繼述하는 데 해롭지 않을 것입니다.” 언필층 신의 망령된 의견이라고 자신을 낮추어 의견을 말하였다. 박연의 세종 때 이루지 못한 제도를 기어이 세워보겠다는 것이었다. 집념도 대단하지만 의지가 참으로 강하였다. 의논하는 자가 말하기를, 경외京外의 양인良人 남편에게 시집가서 낳은 사람을 추쇄推刷하여 입속入屬하게 하면 잇댈 수 있을 것이라고 하나, 가동의 임무는 반드시 용모 성음聲音 성품 생리生理로 골라야 하므로 사람 수가 많은 곳에서 무리를 모아놓고 간택揀擇하여야 하는데 무동을 처음 설치한 법에 의하여 가동을 세운다면 잇댈 수 있고 오래 갈 수 있다. 외방外方 각 고을에 숫자를 책임 지우고 경상도 66 전라도 56 충청도 53 총 175고을에서 3고을에 한 사람의 아이를 정하여 내게 한다면 58인이 될 것이며 경기도 41 황해도 25 강원도 23 총 87고을에서 5고을에 한 사람의 아이를 정하여 내게 한다면 17인이 될 것이니 합하면 75인이 되는데 이로써 액수를 정하고 경외에 장부를 비치하고 윤차輪次로 숫자를 충당하면 될 것이다. 대개 동기童伎를 바꾸어 세우는 기한이 7, 8년 뒤에 있으니 만약 세 고을에서 윤차로 한 사람의 아이를 세운다면 반드시 21, 2년이 걸려서 도로 처음 세운 고을로 돌아가고 다섯 고을에서 윤차로 한 사람의 아이를 세운다면 모름지기 38, 9년이 걸린 뒤에 처음 세운 고을에 돌아갈 것이니 이와 같이 한다면 바꾸어 대신하게 하는 기간이 매우 넉넉하여 동기의 숫자가 항상 찰 것이다. 이와 같이 하며 양인良人의 남편에게 시집 가서 낳은 사람이나 여기女妓 무녀巫女의 자식을 이에 더하면 가동을 잇댈 수 있고 오래 갈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세종 임금이 창립한 회례연會禮宴 양로연養老宴의 악樂이 자연히 옛날로 복구하여져 오늘날 거듭 새로워지고 길이 후세에 전하여져 일거에 만전萬全할 것이다. 먼 앞날을 내다보는 계책이었다. 대단히 현실적이고 구체적인 방안이었다. 누가 있어 이렇게 주도면밀한 생각을 실현하는 묘책을 제시할 수 있을까. 예와 악의 분야 악의 분야, 그것도 그 하부 구조라고 할까 악과 관련한 세세한 분야에 이르기까지 소중하게 대처하는 그리고 너무나 전문적이고 자상한 방안이었다. 정말 박연이 아니고는 할 수 없는 일이었다. 전왕前王이 하지 못한 것까지 요구하고 있었다. "원컨대 전하께서는 이를 한번 시험하여 보소서.” 끈질기고 간곡한 박연의 상언은 계속되었다. 셋째 중국에서는 공공 연회에 여악女樂을 쓰지 않았고 태종 임금은 연향에 여악을 쓰지 말라고 하였고 세종 임금은 여러 대 내려오는 유풍遺風이기 때문에 가볍게 고치는 것을 무겁게 여겼으나 새 황제가 등극하고 마침 성주城主가 즉위하는 초기를 당하여 덕德을 새롭게 하는 바로 그러한 때에 구습舊習을 따라서 여악을 쓴다면 적의適宜한 바가 아니다. 넷째 악부樂部의 악에는 제향악祭享樂이 있고 연향악宴享樂이 있는데 제악祭樂은 봉상시奉常寺 십이궁보十二宮譜와 20여 장章이 있어서 이습肄習한 지가 오래이나 연악宴樂은 세종 임금이 주문공朱文公의 의례경전통해儀禮經傳通解 중에서 아악시장雅樂詩章 12편의 악보를 얻어 표제表題하여 내었고 보법譜法이 크게 갖추어졌으며 그 중에서 성음聲音이 아름다운 것을 골라 회례연 양로연으로 들이었으며 보법 전체를 주자소鑄字所에 명하여 인출印出하도록 전한 지 지금까지 21년이나 아직도 인행印行하지 못하고 있다. 만약 보법을 한 번 잃으면 이미 퍼진 금석金石의 음音도 소종래所從來를 알지 못할 것이니 융안지보隆安之譜가 어려魚麗 제4장에서 나오고 서안지보舒安之譜가 황황자화皇皇者華 제2장에서 나오고 휴안지보休安之譜가 남산유대南山有臺 제3장에 나오고 수보록受寶籙이 녹명鹿鳴 제1장에서 나온 것과 같은 사실을 후세 사람이 어찌 알겠는가. "원컨대 전하께서 거듭 인행하도록 명하고 미루어 두지 말도록 한다면 심히 다행함을 이기지 못할 것입니다.” 박연의 상언을 의정부에 내려서 영의정 하연河演 우의정 남지南智 좌찬성 김종서金宗瑞 등이 의논한 결과 모두 그대로 따르고 여악을 사용하는 것은 우선 구습舊習을 따르게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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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용무’ 예능보유자 김천흥의 '춘앵무'심소(心韶) 김천흥(1909~2007)은 중요무형문화재 제1호 ‘종묘제례악’(해금과 일무), 39호 ‘처용무’ 예능보유자로 활약했다. 이왕직 아악부 아악수장, 국립국악원 원로사범, 대한민국예술원 회원 등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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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국악원, 故황병기 '아악부 가야금보' 등 1215점 수집국립국악원이 고(故) 황병기 명인이 소장한 아악부 '가야금보'를 비롯한 1215점의 국악 자료를 7명의 기증자로부터 수집했다고 밝혔다.황병기 명인이 소장한 아악부 '가야금보'와 거문고의 대가 이수경의 '현금보' 등 고악보 5종을 포함해 전인평 중앙대 명예교수가 1970년대에 작곡한 음원과 육필 악보, 천승요 아카이브천 대표가 직접 기록한 1970~80년대 판소리 공연 음원, 전남 진도 지역 명창인 손판기의 소리 녹음 음원 등이다.아악부 '가야금보'는 황병기 명인의 유족인 부인 한말숙 여사가 기증했다. 아악부 악보는 1930년대에 필사 제작된 궁중음악 악보집으로, 이왕직아악부의 음악을 전해주는 귀한 자료다. 국립국악원은 이번 수집을 통해 정간보로 기보된 아악부 악보 10종을 모두 확보하게 됐다. 아악부 악보 10종은 현재 국가등록문화재로 지정 절차를 진행 중이다.전인평 명예교수와 천승요 대표가 기증한 릴 테이프는 1970~80년대의 공연 현장을 담고 있다. 또 샤머니즘박물관 관장 양종승으로부터 황해도굿 계승자 우옥주의 유품 장구와 인천풍류 김응학의 양금을 기증받아 근현대 민속 현장의 악기를 확인할 수 있게 됐다.국립국악원은 국악박물관과 국악아카이브를 통해 기증컬렉션을 수집·관리하며, 현재 110여개의 기증자 컬렉션과 18만점의 유물과 기록을 소장하고 있다. 수집된 자료는 저작권 등 검토와 권리 처리 후 국립국악원 홈페이지와 국악아카이브 홈페이지를 통해 대국민 서비스를 실시할 예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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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국악원 1,215점 국악 자료 수집국립국악원은 올 상반기 7명의 기증자로부터 국악 관련 자료 1,215점을 수집했다. 황병기 이화여대 명예교수가 소장한 아악부 『가야금보』와 거문고의 대가 이수경의『현금보』등 고악보 5종을 포함하며 전인평 중앙대 명예교수가 1970년대에 작곡한 음원과 육필 악보, 천승요 아카이브천 대표가 직접 기록한 1970년대~80년대 판소리 공연 음원, 전라남도 진도 지역 명창인 손판기의 소리 녹음 음원, 양종승이 소장했던 만신 우옥주의 장구 등이다. 황병기 선생이 소장하고 있던 아악부『가야금보』는 유족인 부인 한말숙 여사가 기증했다. 아악부 악보는 1930년대에 필사 제작된 궁중음악 악보집으로, 이왕직아악부의 음악을 전해주는 귀한 자료이다. 국립국악원은 이번 아악부『가야금보』를 수집함으로써, 정간보로 기보된 아악부 악보 10종을 모두 확보하게 되었다. 현재 국립국악원 소장 아악부 악보 10종은 국가등록문화재로 지정 절차를 진행 중이다. 전인평 중앙대 명예교수와 천승요 아카이브천 대표가 기증한 릴 테이프는 1970년~80년대의 공연 현장을 담고 있다. 진도 지역의 명창인 손판기 선생의 옛 소리를 확인할 수 있는 음원과 국악애호가인 김 북이 소장하던 국립국악원 시조연구회 강습악보(1954년~1961년 발행 추정)도 포함한다. 샤머니즘박물관 관장 양종승에게 황해도굿 계승자 우옥주의 유품 장구와 인천풍류 김응학의 양금을 기증받아 근현대 민속 현장의 악기를 확인할 수 있게 되었다. 국립국악원은 국악박물관(1995~)과 국악아카이브(2007~)를 통해 기증컬렉션을 수집·관리하며, 현재 약 110여 개의 기증자 컬렉션과 18만 점의 유물과 기록들을 소장하고 있다. 국립국악원은 수집된 자료에 대해 저작권 등의 검토와 권리 처리 후 국립국악원 홈페이지(www.gugak.go.kr)와 국악아카이브(archive.gugak.go.kr) 홈페이지를 통해 대국민 서비스를 실시할 예정이다. 국악 관련 자료의 기증 및 기탁에 대한 문의처는 02-580-3375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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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립국악원, 작곡가 이강덕의 작품, 관현악 무대국립국악원 창작악단이 창작 국악 대표 레퍼토리를 선보이는 기획공연 ‘한국 작곡가 시리즈1’을 오는 21일과 22일 서울 서초구 국립국악원 예악당에서 개최한다. 해방 이후 현대 사회로 접어들면서 한국에 유입된 서구 공연 문화에 대응하는 방안 중 하나로 전통 음악계가 '국악관현악'을 고안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작곡가 8명(김희조·이강덕·김영재·백대웅·박범훈·이해식·이상규·김영동)의 명곡을 모아 이틀에 걸쳐 소개한다. 1962년부터 국립국악원에서 추진한 ‘신국악작곡 공모’ 선정작을 엄선해 선보인다.21일 첫 무대는 창작국악 1세대 작곡가 김희조(1920~2001)의 ‘합주곡 1번’과 이강덕(1928~2007)의 ‘메나리조 주제에 의한 피리협주곡’으로 문을 연다. 이어 거문고산조 예능 보유자이자 해금 명인인 김영재의 해금협주곡 ‘공수받이’, 국악 이론가 백대웅의 ‘최옥삼류 가야금 산조 협주곡’과 ‘연변목가’로 첫날 무대를 마무리한다. 22일 두 번째 무대는 KBS국악관현악단의 초대 상임 지휘자로 활동한 이상규(1944~2010)의 대금협주곡 ‘대바람소리’, 국립국악관현악단을 창단하고 한·아세안 전통음악 오케스트라를 결성시킨 박범훈의 ‘춘무’와 25현가야금협주곡 ‘새산조’를 선보인다. 전국을 다니며 직접 채집한 다양한 토속민요와 굿음악을 ‘바람’으로 표상해 작곡한 이해식(1943~2020)의 젊은이를 위한 춤 ‘바람의 말’에서는 한국인의 함축된 정서를, 다양한 영화와 TV 드라마의 음악을 작곡하며 국악 대중화에 앞장선 김영동의 초기작‘단군신화’에서는 아악의 정제된 선율과 민속악의 멋을 전한다. 김영동의 작품에는 국립국악원 정악단의 가객 김병오와 박진희가 무대에 올라 공연의 마지막을 장식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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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흙의 소리 <93>흙의 소리 이 동 희 연결 <5 > 박연은 왕에게 충성을 하였고 왕은 박연은 총애하였다. 신하가 왕에게 충성을 하고 나라에 충성을 하는 것은 너무도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왕이 신하를 총애한 것은 행운이라는 것이다. 그것이 사실이라면 말이다. 총애는 유난히 사랑하는 것이다. 왕이 신하를 그 누가 됐든 사랑하는 것은 또 당연한 것인지 모르지만 특별히 유난히 사랑하는 것은 드문 일이요 귀한 일이요 행운이 아닐 수 없다. 임금이 하고자 하는 바를 신하가 혹 저지하고 신하가 하고자 하는 바를 임금이 혹 듣지 아니하기도 하는데 그 반대의 경우인 것이고 박연의 경우는 언제나 임금이 하고자 하는 바를 먼저 알아서 행하였다. 임금이 그것을 몰랐겠는가. 몸소 주고 받아 정이 들었고 그 큰 경륜을 협찬하였다고 토로한 난계 선생 유고의 첫 번째 글인 시 「송설당에서」(題松雪堂)에 씌인 대로, 천 길 샘을 파던 그 의지 삼태미 흙을 쌓아 산을 이뤘다. 세종임금에 대한 정이요 그 결과였다. 일에 대한 열정 그것을 이룩한 성취감 또 그로 인한 책임과 사명감으로 이어지는 업적, 그것이 빛이 나는 것이든 어떤 것이든 귀중한 것이며 값진 것이다. 사랑이었다. 항상 사랑하고 그리며 몽매夢寐에도 잊을 수 없는 정이 맺어진 것이었다. 연결戀結이었다. 박연의 일과 꿈과 삶은 그런 것이었다. 하나의 피리를 불 듯 거문고를 타듯 글을 써서 올리고 악기를 만들고 악장을 만드는 것들이 다 그랬다. 예악, 예학 음악에 대하여 그가 얼마나 많은 공력과 조예와 천부적인 재질을 가진 것인지에 대하여는 또 평가하기에 달렸지만 그저 평범하였고 특출한 것이 없었다. 부지런하고 끈질기고 쉽게 실망하지 않고 포기하지 않는 성격이라고 할까 천성을 타고 났는지는 모른다. 스물 여덟에 생원과에 급제하였고 서른 넷에 진사과에 급제하였으며 마흔 둘에 집현전 교리에 배수되어 직무를 시작하였다. 박연은 주어진 자리와 그가 해야 될 일에 대하여 전심 전력을 다 하였고 자신이 맡은 일을 천직으로 알았다. 무슨 일이나 자신에게 주어진 일은 하늘이 내려준 기회라 생각하고 거기에 혼신의 힘을 다 바쳤다. 사간원司諫院 정언正言과 사헌부司憲府 지평持平의 자리에 임명되고 세자 시강원侍講院 문학文學으로 발탁되었을 때 그가 할 수 있는 일은 밤을 새워 공부하고 자신이 가진 모든 능력을 다 하는 것이었다. 그가 아는 지식이고 예의이고 능력을 다 쏟아 놓는 것이다. 다른 일에도 그랬다. 의영고(義盈庫) 부사副使로 있으면서 젊은 의녀醫女들의 교육을 철저하게 하였고 약재藥材 생산 관리하는 일을 맡아 볼 때도 있는 능력을 다 발휘하였다. 그리고 마흔 여덟, 등과 후 2십년이 되어 악학별좌樂學別坐의 자리에 앉게 되었다. 그 때서부터 박연의 음악에 생을 바치는 시기가 도래한 것이었다. 어렵고 막중한 예악의 실천 기회가 온 것이었다. 그야말로 하늘이 그에게 내려준 특별한 기회였다. 그러고 보니 그에게 음악적 재질이 있었던 것이다. 정말 그랬다. 어릴 때 산에 올라 피리를 불면 산새들이 모여서 가락에 맞추어 노래하고 토끼와 너구리가 한 편에서 춤을 추었다. 부모님 묘 앞에서 시묘를 할 때 피리를 불어 산짐승들을 다 불러모은 중에 호랑이도 와서 같이 지내지 않았던가. 지금 그 호랑이는 그의 내외 무덤 앞에 같이 묻혀 있지만. 정말 그에게 그런 기질이 있었는지 모른다. 금수禽獸까지 감화시킨 재질이라고 할까 능력이라고 할까. 그리고 아버지 어머니 돌아가실 때 가례家禮와 제례祭禮를 성실하게 행하고 조상을 추모하고 제사를 지내는 등 신종愼終과 추원追遠을 극진히 행하였던 바탕이 있었던 것이다. 어떻든 그는 자리를 맡자 마자 악서樂書를 찬집纂輯하고 악기와 악보법樂譜法을 만들도록 예조에 수본手本을 올리었다. 참으로 기개가 대단했다. 어디서 그런 용기가 생겼는지 모른다. 문신 1인을 본 악학에 더 설정하여 악서를 찬집하게 하고 또 향악鄕樂 당악唐樂 아악雅樂의 율조를 상고하여 그 악기와 악보법을 그리고 써서 책을 만들자는 것이었다. 예조에서 그대로 따랐다고 세종실록에 기록되어 있지만 악서찬집은 이루어지지 않아 문종 즉위년에 청인행악보소淸印行樂譜疏를 다시 올리고 있다. 용기도 대단하지만 참 끈기도 대단하였다. 좌우간 그렇게 시작된 박연의 집념은 산을 이루고 바다를 이루었다. 예악 음악의 집념이었다. 쉰 여덟, 태평악을 짓기까 10년간이었다. 그동안 모든 정수를 다 쏟아 부은 헌신이며 연결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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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흙의 소리<91>흙의 소리 이 동 희 연결 <3> 그해(세종 15년) 1월 1일 세종은 근정전에서 왕세자와 여러 신하에게 신년하례를 받은 후 회례연會禮宴을 베풀었다. 몇 번 얘기한 대로 그 때 처음으로 아악雅樂을 사용하였다. 왕은 아악을 만든 박연에게 말하였다. "내가 조회 아악을 창제創制하고자 하는데 입법立法과 창제가 예로부터 하기가 어렵다. 임금이 하고자 하는 바를 신하가 혹 저지하고 신하가 하고자 하는 바를 임금이 혹 듣지 아니하며 비록 위와 아래서 모두 하고자 하여도 시운時運이 불리한 때도 있는데, 지금은 나의 뜻이 먼저 정하여 졌고 국가가 무사하니 마땅히 마음을 다하여 이룩하오.” 이 대목을 상기시키며 회례악을 연주하는 날 세종이 말하는 조회아악이란 무엇일까, 소설은 용비어천가에 답이 있다고 하였다. 세종이 창제하자고 하는 조회아악은 박연이 마음을 다 하여 이룩해야 하는 훈민정음과 그리고 용비어천가를 의미하고 마음을 다하여 이루어야 할 훈민정음은 둘만의 은밀한 약속이었고 당시는 아직 용비어천가라는 이름이 없었기 때문에 막연하게 조회아악이라고 표현하였다고 하였다. 그러며 애초에 박연은 훈민정음과 용비어천가를 비슷한 시기에 구상하였다고 쓰고 있다. 종묘제례악의 발전된 형태가 용비어천가로 볼 수 있고 육룡六龍은 태조 태종과 태조의 4대조이며 앞에 얘기한 박연의 1번 소疏의, 오음五音 정성正聲으로 풍속을 바로잡자는 것과 세종 9년 6월 23일에 박연이, 사대부는 사조四祖까지 제사 지내기를 청하였는데, 이와 맥락이 같다. 박연은 이 때 훈민정음과 용비어천가의 제작을 제안하였다고 소설은 쓰고 있다. 그러면서 두 프로젝트가 서로 맞물려서 진행되었고 뒤에 전개되는 과정에서 박연은 훈민정음을 백성의 교육에 필요한 것으로서 생각했고 세종은 훈민정음을 조선왕조의 안정에 기여할 용비어천가 재작에 필요한 것으로 생각하였음을 알 수 있다고 하였다. 그리고 다시 결론을 내렸다. 박연은 훈민정음을 창제創製하였고 세종은 훈민정음을 창제創制하였다. 훈민정음은 박연의 제안과 개발 그리고 세종의 지원으로 이루어진 것이라는 것이다. 創製는 전에 없던 것을 새로 만드는 것이고 創制는 전에 없던 것을 처음으로 제정制定하는 것이다. 그러면서 박연의 훈민정음 창제 목적 원리를 말하고, 왜 세종은 훈민정음을 언문諺文이라 하였나, 세종의 언문청 박연의 정음청에 대하여 말한 다음 훈민정음 창제자는 박연이라고 하였다. 훈민정음 창제에 대한 또 하나의 얘기, 신미대사信眉大師 창제설에 대하여는 가능성이 없다고 소설은 말하고 있다. 신미란 이름이 세종실록에 처음 등장한 것도 훈민정음 창제 3년이 지난 세종 28년이고 신미는 불경의 훈민정음 번역에 관여하면서 훈민정음 보급에 크게 이바지한 것으로 여겨진다고 하였다. 그리고 박연과 신미의 관계를 밝혀 박연의 조부 박시용朴時庸은 신미의 고조부 김영이金令貽의 사위이며 김영이의 후손 신미는 박연 때문에 훈민정음의 존재를 잘 알았을 터이고 우리 글로 불경을 번역하여 한문을 모르는 사부대중에게 불경의 내용을 전하고 싶었을 것이라고 유추하기도 하였다. 소설 『박연과 훈민정음』은 그러나 박연의 훈민정음 창제의 비밀을 말하지 않고 정인지鄭麟趾의 훈민정음 서문序文으로 대신하고 있다. "그 연원淵源의 정밀한 뜻의 오묘奧妙한 것은 신이 능히 발휘할 수 있는 바가 아니다. 삼가 생각하옵건대 우리 전하께서는 하늘에서 낳으신 성인聖人으로서 제도와 시설이 백대百代의 제왕보다 뛰어나시어 정음正音의 제작은 전대의 것을 본받은 바도 없이 자연히 이루어졌으니 그 지극한 이치가 있지 않은 곳이 없으므로 인간행위의 사심私心으로 된 것이 아니다.” 훈민정음을 반포할 때 세종임금의 서문 ‘나랏말이 중국과 달라 문자와 서로 통하지 아니 하므로…’ 다음에 본문이 있고 그 뒤에 정인지의 서문이 있다. 발문跋文이 아니고 서문이라고 하였다. 훈민정음 창제자는 진정 누구인가, 그러나 정인지는 천기를 누설할 수 없었다. 소설은 정인지의 서문 중 ‘그 글의 오묘한 뜻에 대하여는 신들이 언급할 일이 아니다’(若其淵源精義之妙則非臣等之所能發揮也)라고 해석한 글도 제시하하여 논리를 세웠다. 글쎄. 논리는 정연하였다. 비약이 있기는 하였지만 어디 꼬투리를 잡을 데가 없다. 그러나 왜 일까. 공감이 가지는 않는 것은. 스스로 그 논리를 부정하고 싶은 것은 아닌데. 다시 한 번 얘기하지만 박연의 악장의 창작 여부를 추적하려다 여기까지 오게 되었다. 세계적인 문화유산의 근본을 흔드는 결과가 되었다. 이에 대하여 소설론에 의탁하여 결론를 맡기고자 한다. 소설은 사실을 넘어 진실을 추구한다. 진실은 말없이 존재하며 영원한 것이다. 무지개 빛깔이라기 보다 하늘빛이다. 아니 빛도 없이 의미만 있는 것인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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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흙의 소리<89>흙의 소리 이 동 희 연결戀結 <1> 연戀은 사랑하고 그리워한다는 뜻이다. 어떤 사람이나 존재를 몹시 아끼고 귀중히 여기는 것이며 어떤 대상을 아끼고 소중히 하고 즐기는 것이다. ᄉᆞ랑ᄒᆞ하다는 생각하다의 옛말이다. 박연은 예악을 즐기고 음악을 소중히 여기며 주야로 추구하였다. 왕을 어릴 때 세자 때는 귀중히 여기고 왕이 되어서는 받들어 모시며 어려워하였다. 다래는 아끼고 애틋하게 생각하였다. 무엇이나 맡은 일을 소중하고 귀중하게 여기고 즐기며 끔직히 생각하였다. 한 시도 반 시도 해찰을 하지 않았다. 사랑이었다. 소중한 생각으로 맺어진 생生이었다. 어느 악장을 누가 지었느냐, 박연이 지었느냐 하는 이야기를 하던 중이었다. 그 일환이다. 박희민의 소설 『박연과 용비어천가』(2016, 도서출판 그루)의 ‘용비어천가의 작사 작곡’을 보면 세종실록 세종 15년 9월 12일 기사를 인용하면서, 문무 두 춤곡의 제작과 환환곡 미미곡 유황곡 유천곡 등 속악의 이름은 박연이 지었다. 이에 대한 최종 결정은 세종이 하였을 것이다. 그런데도 용비어천가의 치화평 취풍형 여민락을 세종이 지었다는 것은 이치에 맞지 않는다. 그렇게 쓰고 있다. 세종실록 기사는, 성악聲樂의 이치는 시대 정치에 관계가 있는 것이다. 지금 관습도감慣習都監의 향악鄕樂 50여 노래는 모두 신라 백제 고구려 때의 이어俚語로써 당시의 정치적 잘못을 상상해 볼 수 있어서 권장할 것과 경계할 것이 되는데 본조本朝가 개국한 이래로 예악이 크게 시행되어 조정과 종묘에 아악과 송頌의 음악이 이미 갖추어 졌으나 민족 노래의 가사를 채집 기록하는 법이 없으니 고대의 노래 채집하는 법(采詩之法)에 의거하여 각도의 고을에 명하여 노래로 된 악장이나 속어임을 막론하고 오륜五倫의 정치에 합당하여 권면할 것과 간혹 짝없는 사내나 한 많은 여자의 노래로서 정치에 벗어난 것까지라도 모두 샅샅이 찾아 내어서 매년 세말에 채택하여 올려보내자고 하였다. 이에 대하여 그대로 따랐다고 예조에서 아뢴 내용이었다. 그리고 박연이 아악과 향악 50수를 정리하였다는 기록을 「용재총화慵齋叢話」(성현成俔)에서 찾아 관습도감 제조提調가 되어 음악을 관장한 사실로 입증해 보이었다. 소설은 그러면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세종은 세종27년(1447) 9월 용비어천가에서 사용할 음악의 대략적인 방향을 제시한 적은 있다. 그러나 이때 세종은, 내가 병이 있어 깊어 궁중에 있으므로 음악을 듣기를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하였는데 세종이 제작하였다는 것은 신화 같은 이야기다. 세종 29년 6월 향약과 당악唐樂을 관현악에 올려 용비어천가를 연주하였다. 소설은 그리고, 앞에 소개한 단종실록 기사를 이어서 붙이고 있다. 볼만한 것은 다 박연의 힘이었다고 한 말을 인용하고 싶었던 것이다. 거기에 더 설명을 붙이지 않으려 한다. 공감이 갔다고 할까. 그러나 다음 대목에서는 한 동안 눈을 의심하고 전후 관계를 다시 보았다. 박희민의 ‘훈민정음 창제는 진정 누구인가’라는 글이다. 그 글의 마지막 대목이다. 『박연과 훈민정음』을 출간한 뒤에 『역주 난계유고』를 지은 다산연구소 김세종 박사로부터 전화를 받았다. 김세종 박사도 ‘박연이 「율려신서」의 음악이론을 기초하여 훈민정음을 개발하였다’는 논문을 몇 년 전에 발표하였다는 것이다. 도무지 믿어지지 않았다. 그리고 다음 글은 더욱 놀라운 사실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난계유고」의 소疏 1번은 차하결次下缺이란 표시로 상소문 일부를 박연이 의도적으로 버렸다는 것을 알 수 있지만, 남은 글을 자세히 살펴보면 거기에 훈민정음 창제의 단서가 남아 있다. 이젠 ‘개발’이 아니고 ‘창제’였다. 소설은 그 중에서 가장 핵심적인 단서가 훈민오음정성訓民五音正聲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주장하였다. 박연은 오음정성을 백성들에게 가르쳐 바른 삶을 살게 하자고 주장하였다. 그러므로 훈민정음의 처음 이름은 훈민오음정성이었다. 오음은 훈민정음 자음 17자요 정성은 훈민정음 모음 11자다. 필자는 앞에서 훈민오음정성에 대하여 이야기하였고 그것과 훈민정음에 대하여는뒤에 다시 이야기하겠다고 한 바 있다. 그러나 지금도 그에 대한 고구考究는 진전이 없는 상태이다. 그리고 훈민오음정성이 담긴 제일 첫번째 소에 대하여 말한 것인데, 박연은 의도적으로 1번 소를 버렸다고 하니 그 사실도 더 알아보아야 하겠다. 박희민은 『박연과 훈민정음』(2012, Human & Book)도 냈다. 거기의 주장을 여기(『박연과 용비어천가』)에서 다시 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다음과 같이 결론을 쓰고 있다. 니체의 학설은 박연에게도 적용된다. ‘죽어서도 자기의 작품이 칭송을 받고 이름이 기억되기를 바라는 건 예술가들의 꿈이다.’ 하지만 작품에 대한 평가가 세상의 몫이듯 그의 이름을 기억하는 것도 세상의 권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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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지학자 김종욱의 문화사 발굴 자료 (34)김종욱 청년작가로서 일찍부터 우리 문단에 빛나는 작품을 내놓아 꾸준한 정진을 하여온 안동수 씨는 일작 28일 오후 마침 일요일을 이용하여 동료들과 한강에서 수영을 하다가 불행히도 익사하였다 한다. 연 35 현금까지 명성고녀에서 교편을 잡고 있었고 뜻하지 않은 유작으로는 목하 인쇄 중에 있는 ‘신문예’ 지 제3호에 단편 ‘산가山家’가 되고 말았다 한다.(藝術通信 252호. 1946년 7월 30일) = 음악 = [8. 15 기념일 아악부가 연주]: 문외불출의 귀족적인 예술로서 있었다면 일부로 편성되는 겨우 연 수회의 라듸오 방송으로부터 우리에게 사귀어온 것뿐인 구왕궁 아악이 금번 8월 15일 기념일엔 창경원내에서 전원 총동원의 특별 기념연주가 있으리라고 한다. 이것이 만약 기획만이 아니고 실현될 수 있다면 빛나는 우리의 고전이 일반에게 재인식되는 의미로 적지 않은 의의를 가지리라고 벌써부터 고대된다.(藝術通信 252호. 1946년 7월 30일) [‘대한연주’ 임시총회서 ‘전국 음악문화협회’로 개칭, 신임위원 박태준 씨 피선]: 대한연주가협회에서는 지난 27일 오후 2시부터 동 임시사무소인 경성 영락정 중앙애육원에서 50 여명 출석 하에 임시총회를 개최한 바 있었는데 석상에서 회합 명칭을 ‘전국음악문화협회’로 변경하는 동시에 그에 따른 역원 개선과 8. 15 행사에 관한 건, 연주 사업에 관한 건 등을 결의하고 동 6시 경 원만 리에 폐회하였다 한다. # 신 역원= 위원장 박태준 ,부 위원장= 채동선, 위원= 이흥렬, 이상춘, 계정식, 안성교安聖敎, 최희남崔熙南, 이유선, 김형로, 이인범, 이관옥李觀玉, 김순애, 김영이金永伊, 한규동韓珪東, 박용구, 김성태, 박태현, 김세형, 김학상金學相 (이상 19명)(藝術通信 252호. 1946년 7월 30일) [청우대] 26일 오후 한 시 경 모 극장 입구에는 때 아닌 활극 한 막이 벌어졌다. 때마침 제1회 개장시간이 임박한 무렵이다. 관객은 극장 안의 구경보다 이쪽 구경이 낳았든가 그렇지 않아도 벅찬 입구의 혼란은 바람 지나간 수수비를 이루다. 활극이란 그맘때 시간이면 으레 한 차례 쯤은 있는 일도 아니지만 모 요인씨 님이 열을 지어 입장하는 옆 틈에 화살같이 끼어들어 입구 수원守員에게 일언반구도 없이 소위 무찰입장無札入場을 한 데서 발단- 아무리 요인이라 한들 으레 소지하였을 통감通鑑이나 혹은 증 등을 응당 제시할 의무가 있을 것이고 또한 인정상으로 보더라도 그 편이 우리 예의일 것인데 이 요인은 ‘누구십니까’ 하는 수원에게 다짜고짜로 ‘사람을 깔보는 거야! ’하고 노성대갈怒聲大喝! 이런 버릇은 확실히 일제 강점기의 못된 행세의 한 가지. 해방도 좋으나 아런 좀 버러지들 철부지의 망동은 이제 누가 달궈 빼줄꼬! 이런 무뢰한들을 울며 개자 먹기로 그냥 묵인타가는 우리 수도 문화에 치욕의 뿌리를 키우는 것이 될 것이니 관계자들 한 차례 여론으로 가르쳐줌이 약하若何?(藝術通信 252호. 1946년 7월 30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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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재소설] 흙의 소리<86>흙의 소리 이 동 희 새 걸음으로 <4> 세종실록 56권에 있는 기록이다. 세종 14년 5월 임금의 영令이었다. "이제 회례 때의 문무文舞 무무武舞 두 가지 춤에 연주할 악장은, 마땅히 현금現今의 일을 가영歌詠하여야 한다고, 박연이 말하였으나 내가 생각해 보니 대체로 가사歌辭라는 것은 성공을 상징하여 성대한 덕을 송찬頌讚하는 것이오.” 임금은 좌우 신하들에게, 주무왕周武王이 천하를 평정하였고 성왕成王 때에 이르러 주공周公이 대무大武를 지었고 역대 다 그렇게 하였다는 사실을 상기하며 말하였다. "나는 다만 왕위를 이었을 뿐인데 무슨 가송歌頌할만한 공이 있겠오. 태조께서는 전조前朝의 쇠잔한 말기를 당하여 백번 싸웠으나 백번 이겨 공덕이 사람들에게 흡족하였으며 어지러운 것을 제거하여 세상을 바른 데로 돌리고 왕업을 창건하여 왕통王統을 후손에게 전하였오. 태종께서는 예악을 새로 제작하셔서 교화가 퍼지고 풍속이 아름다워졌으며 안과 밖이 또 편안하도록 하셨오. 태조를 위하여 무무를 제작하고 태종을 위하여 문무를 지어서 만세에 통용할 제도로 하는 것이 마땅하나, 무를 문보다 먼저 하는 것이 온당하지 않을지도 모르겠오. 역대의 제도 중에도 문부다 무를 먼저 하는 것이 있는지. 만약 현금의 세상 일로 노래를 지어야 한다면 세대를 계승하는 임금은 다 그를 위한 악장이 있어야 할 것이니 어찌 그들의 공덕이 다 찬가를 부를 만한 것이겠는지. 그것을 박연 정양鄭穰 등과 같이 의논하여 물어보도록 하시오.” 임금의 말에 지신사知申事 안숭선安崇善 좌대언左代言 김종서金宗瑞 등이 아뢰었다. "마땅히 태조를 위하여 무무를 만들고 태종을 위하여 문무를 만들 것이며 겸하여 현금의 일도 노래하는 것이 좋겠습니다.” 좌부대언左副代言 권맹손權孟孫도 아뢰었다. "마땅히 임금의 말씀과 같이 태조 태종을 위하여 나누어 문무 두 가지 춤을 만들어야 합니다. 지금 시대의 일은 뒷세상에서 반드시 가영歌詠할 것입니다.” 세종실록 58권의 세종 14년 10월의 기록이다. "문과 무 두 가지 춤의 가사 1장으로는 그 가운데에 태종 태조의 공덕을 다 찬송하기에 미진함이 있으니 다시 1장을 더함이 어떨까.” 임금이 상호군上護軍 박연에게 이르자 박연이 아뢰었다. "성상의 하교가 진실로 옳습니다.” "마련磨鍊하시오.” "1장 가운데에 태조 태종의 공덕을 공덕을 겸하여 기림은 미흡하오니 원컨대 각각 공덕을 따로 1장씩 찬송하여 모두 2장의 기사를 만들어 각각 8박자로 하고 춤을 출 때에 제1변變은 태조를 기리고 제2변은 태종을 기리어 서로 차례대로 송덕頌德하고 제6변에 이르러 태종에서 끝마치되 악이 끝나면 물러가게 하옵소서.” 박연은 악장의 구성을 다시 아뢰었다. 세종실록은, 그대로 따랐다고 기록하고 있다. 위의 두 기록과 박연의 연보를 연결해 보았다. 나라에서 대업을 이루니 태평악을 지었다고 하였는데, 나라의 대업이란 새 나라가 들어서고 새로운 통치가 자리를 잡음으로써 혼란한 시대가 가고 안정이 되어 정치 경제 사회 문화 등 전반적인 기틀을 잡은 그 때 시기를 말한 것이리라. 세종시대는 우리 민족의 역사에서 가장 찬란한 문화가 이룩된 때라고 한다면 그 꽃이 피는 화려한 시기였다고 할 수 있다. 세종 15년 전후 박연의 50대 중반 그의 생의 절정기였다. 집현전을 통해 많은 인재가 배출되었고 의례 제도가 뿌리를 내렸으며 편찬사업이 활발히 전개되었고 농업 과학 예술 의학 기술의 발전, 법제의 정리, 국토의 확장 등 민족 국가의 기틀이 확고해졌고 날로 융성하였다. 세종은 태종이 이룩한 왕권의 안정 기반 위에 소신 있는 문화정책을 적극적으로 펼칠 수가 있었다. 특히 유교정치는 예악 정책으로 대변되는 도덕과 문화의 정치였다. 박연에게는 향악을 정리하고 아악을 짓고 편경과 편종 등의 악기를 제작하게 하는 등 음악 중흥에 이바지하게 하여 예악의 시대를 꽃피게 하였다. 세종시대의 후반을 열매의 시대라고 한다면 꽃이 피고 잎이 무성한 이 때는 국가 대계 나라의 대업을 이룬 시기이다. 그런 생각을 하였다. 그런 것 같다. 그러면 태평악은 어떤 것인가. 기록들을 다 뒤졌지만 태평악이라는 이름은 찾을 수가 없다. 임금이 마련하라고 하였던 그 악장은 어디 있는 것인지. 태평지악太平之樂은 영조英祖 때 연례악宴禮樂의 한 곡명이다. 태평악지곡太平樂之曲은 순조純祖 때 연례악의 또 한 곡명이고. 태평년지악太平年之樂은 세종 13 14 15년 실록에도 나오고 다른 곳에서도 보이는데 박연이 지은 것이 물론 아니다. 다른 이야기이지만 2009년 공연한 국립국악원 제작 「태평지악-세종, 하늘의 소리를 듣다」까지 뒤져 보았다.